白土와 粘土
도자기는 흙을 빚어서 보물을 만드는 것이니 무엇보다도 그 소재인 흙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도자기는 고려 시대는 청자였는데 조선에 와서는 백자로 전환되었다. 우리 도자사 연구에 중요한 것은 고려왕조가 조선왕조로 교체되는 시기에 도자기도 청색애서 백색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이다.
청자의 소재인 점토는 지표면에서 취토할 수 있지만 백토는 일종의 광물질로서 그 맥을 따라 채굴하는 것이니 청자의 점토와는 달리 백토를 확보하는 데는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청자의 점토보다 백자의 고령토는 구하기도 어렵고 원료비용이 많이 든다. 그런데도 백자로 전환하였다. 그 이유를 밝히는 일이 조선 도자사연구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 연구의 토대가 되는 백토는 어떻게 채굴되고 조달되었는가를 사료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朝鮮王朝實錄』등에 등제된 백토에 관한 사료는 다음과 같다.
<1> 세종 5년(1423) 4월 21일(신미) 11번째 기사, 황해도 봉산 서면의 백토를 굶주린 백성이 쌀가루에 섞어먹다. 황해도(黃海道) 봉산(鳳山) 서면(西面)의 백토(白土)와 서흥(瑞興) 남산(南山)의 백적토(白赤土)는 감미(甘味)가 있다 하여, 굶주린 백성들이 파서 쌀가루를 섞어 먹어 요기(療飢)하였다.
<2> 세종 9년(1427) 5월 22일(기유) 3번째 기사, 경상도 채방 별감 백환이 녹반 15근을 바치다. 경상도 채방 별감(採訪別監) 백환(白環)이 고성(固城)에서 생산된 백토(白土)를 달이어 녹반(碌磻) 15근을 만들어 바치었다
<3> 세종 28년(1446) 5월 13일(경진) 2번째 기사, 산릉 도감으로부터 석실 축조에 대한 건의를 받다. 석실(石室)안의 바닥에는 동망(銅網)을 꽉 차게 깔고, 동망의 4면에는 철차정(鐵叉釘)으로 누르고, 석체(石砌)를 그 위에 놓고, 석체 안에는 황토(黃土)와 세사(細沙)로 단단히 쌓고, 석체(石砌) 밖에는 본토(本土)와 거친 모래로 서로 섞어 매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 4025]삼물(三物) : 석회(石灰)·세사(細沙)·백토(白土).
<4>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안동 대도호부, 청송군, 토산(土産)은 신감초(辛甘草)와 백토(白土)가 청부현의 북쪽 방광산동(放光山洞)에서 나고, 주토(朱土)가 송생현의 동쪽 쌍암사(雙巖寺) 북쪽 산의 거현(迲峴)에서 난다.
<5> 세조 9년(1463) 윤7월 3일(경신) 1번째 기사, 경상도 경차관 유완이 복명하고, 여러 고을의 산물을 바치다. 영산현(靈山縣)의 연철(鉛鐵)과 비슷한 돌, 영해부(寧海府)의 녹석(綠石), 웅천현(熊川縣)의 빛이 나는 백토(白土) 등의 물건이었다.
<6> 세조 12년(1466) 6월 7일(병오) 1번째 기사, 백자기의 일반 사용을 금하다. “무릇 백토(白土)가 산출(産出)되는 곳은 소재읍(所在邑)으로 하여금 도용(盜用)을 금하고 빠짐없이 장부에 기록하여 본조(本曹)와 승정원(承政院)에 간수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 조문은 백토에 대한 봉쇄(封鎖)령이다. 그러나 완전히 봉쇄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왕실용 백자는 계속 생산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또 분청사기의 분장용 백토는 공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학자 熊海堂은 조선에는 백토가 귀하였기 때문에 도공들이 해외로 유출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 鄭良謨는 이 금령을 무시하고 조선 초기에 많은 양의 백자를 생산하였고 따라서 서민들도 왕실과 함께 백자를 썼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문헌에도 유품에도 근거는 없다.)
<7> 성종 22년(1491) 5월 17일(임진) 2번째 기사, 경상좌도 절도사 하숙부가 하직하다. 우전(羽箭)은 좌상(左廂)에서는 청토(靑土)를 사용하고, 우상(右廂)에서는 백토(白土)를 사용하고, 중상(中廂)에서는 황토(黃土)를 사용하여, 우전(羽箭)에 바르도록 할 것.
<8> 선조 10년(1577) 1월 29일(정사) 1번째 기사, 천안에 여역이 번져 의원을 보내 구원하다. 양계와 서울에도 생겼다. 온 도성이 소란스럽게 보리쌀을 구입하였으므로 보리쌀 값이 뛰어올라 겉보리 값이 백미(白米) 값과 같았다. 혹 구입하지 못한 사람은 또 대부분 백토(白土)로 문밖과 벽위에 손바닥을 그렸다.
<9> 광해 13년(1621) 12월 11일(무인) 2번째 기사, 사헌부가 곡산 군수 박성룡과 당진 현감 심정익의 치죄를 청하다. 이전에 사옹원 봉사로서 백토(白土)를 채취할 때 많은 군인을 풀어주고 미포를 징수하여 갑자기 큰 집을 지었기 때문에 이미 물의를 빚은 바 있습니다.
<10> 숙종 8년(1682) 7월 14일(기미) 2번째 기사, 장령 신양이 상소하여 관직 제수의 폐단 등을 아뢰다. 상소의 끝에 이어서 남이성(南二星)이 사신(使臣)으로 가서 근신하지 않은 과실과 경주(慶州)의 백토(白土)를 채굴(採掘)하는 폐단을 아뢰었다.
<11> 숙종 35년(1709) 1월 2일(갑술) 1번째 기사, 양구의 백토 파내는 역사를 재차 파하도록 명하다. 양구(楊口)의 백토(白土) 파내는 역사를 재차 파(罷)하도록 명하였다. 당초에 양구는 고을이 잔약하고 백성들이 가난하므로 사옹원(司饔院)에 명하여 다른 고을의 백토를 옮겨 오도록 했었는데, 사옹원에서 양구의 백토가 아니면 그릇이 몹시 거칠고 흠이 생기게 됨을 들어 아뢰면서 다시 가져다가 쓰기 청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었다가, 영(令)을 반포하기 전에 마침 양구 현감(楊口縣監) 이당(李簹)이 차사원(差使員)이 되어 입대(入對)하여, 백토 파내는 역사를 파하면서부터 다행히 다른 폐단은 없다고 진달하자, 임금이 민폐(民弊)가 되어 온 것을 알아차리고서 다시 파하도록 명한 것이다.
<12> 숙종 39년(1713) 7월 20일(을축) 3번째 기사, 여러 신하들이 뇌물을 받은 소통사 김영걸의 일·시지(試紙)의 사용의 일·백토 굴취의 폐단 등을 의논하다. 봉산(鳳山)에서 백토(白土)를 굴취(掘取)한 폐단에 대해 말하기를, “백토는 처음 양구(楊口)에서 굴취하다가, 폐단이 있기 때문에 본현(本縣)의 현령이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그만두고 봉산으로 옮겨 정하였는데, 봉산의 폐단을 도리어 양구보다 심합니다. 일찍이 듣건대 양구현에서는 만약 그 고을의 전부(田賦)를 모조리 감해 주면 담당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본현의 전부(田賦)는 그 수량이 많지 않아서 봉산에서 수납(輸納)하는 비용과 거의 맞먹으니, 지금 만약 그 전부를 견감하고 백토 5백 석(石)을 아울러 굴취해 바치게 한다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진주(晋州)의 백토는 품질이 양구의 것보다 못한데, 원 수량이 2백 50석이어서 비록 50석의 수량을 감하더라도 넉넉히 쓸 수 있고 그 폐단도 또한 감할 수 있으니, 지금부터 마땅히 2백 석으로 정하소서.”
<13> 숙종 40년(1714) 8월 23일(임진) 2번째 기사, 정언 조명겸이 양구현 백성들이 백토(白土)를 채굴하는 폐단에 대해 상소하다. 정언(正言) 조명겸(趙鳴謙)이 양구현(楊口縣)에서 소명(召命)을 받들고 들어와 양구 백성들이 백토(白土)를 채굴하는 폐단에 대하여 상소로 진달하기를, “백점토(白粘土)는 높은 산 가운데에 있는데, 양구의 부역(赴役)에 응하는 민호(民戶)는 5백 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5백 호의 백성으로 천 길이나 되는 높은 산꼭대기를 타고 뚫게 하여 겨우 토맥(土脈)을 찾으면 언덕이 바로 무너져 압사(壓死)하는 역부(役夫)가 없는 해가 없습니다. 수개월의 공력을 들여 5백석의 정토(正土)를 겨우 채취한 뒤 춘천·홍천·인제·낭천·양구 다섯 고을에서 각기 인부(人夫)를 내어 선소(船所)로 운반하여 분원(分院)에 상납하는데, 춘천·홍천·인제·낭천 네 고을은 당초 채굴하는 역사(役事)에는 참여하지 않고 다만 운납(運納)하는 수고로움만 담당하는데도 오히려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더욱이 이 양구 고을에는 지토선(地土船)도 없이 백토를 채굴하는 중역(重役)을 홀로 떠맡고 있는데, 또 운납하는 큰 역사(役事)를 더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소를 사옹원(司饔院)에 내렸다. [註 17063]지토선(地土船) : 지방의 백성이 소유한 배
<14> 영조 17년(1741) 6월 4일(정유) 3번째 기사, 관동 안집 어사 김상적이 복명하니, 진구하는 행정 및 수령의 현부를 하문하다. 양구(楊口)에서 백토(白土)를 파서 번원(燔院)에 바치게 하므로 백성들의 폐단이 매우 많다고 말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5> 영조 19년(1743) 1월 18일(계유) 1번째 기사, 사옹원에서 자기소의 백토를 본도에서 차원을 정해 보내도록 아뢰다. 사옹원(司饔院)에서 아뢰기를, “올해 자기소(磁器所)의 백토(白土)는 전례에 의거하여 본도(本道)에서 차원(差員)을 정해 파서 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6> 영조 대왕 행장(行狀). 6월 관동(關東)에서 백토(白土)를 파내는 일을 멈추게 하고 이어서 사옹원(司饔院)에 명하여 가을에 굽는 일을 그만두게 하셨는데, 어사(御史)의 말을 따른 것이다
<17> 정조 19년(1795) 8월 6일(갑신) 5번째기사, 사옹원 제조 이동 등이 기교부린 자기를 구한다는 일로, 사기 제조의 금령을 내리다. 분원(分院)의 폐단으로 말하면, 백성들과 고을에서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고 기기묘묘하게 만들어내는 일이 날이 갈수록 성해져 백토(白土)와 청회(靑灰)를 공급하느라 먼 지방에까지 피해를 끼치고 있다.
<18> 고종 31년(1894) 12월 27일(기사) 3번째기사, 총리대신 등이 영남의 민폐를 지적하고 시정하는 대책을 아뢰다.. 사옹원(司饔院)에 바치는 진주(晉州)의 백토(白土)와 정비(情費) 몫의 쌀을 영영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하는 문제입니다. 백토는 점점 적게 나고, 또 임대한 배에 더 실을 것도 없으니 위에서 든 백토와 정비(情費) 몫의 쌀은 모두 영구히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정하며, 분원(分院)의 사기 굽는 장인(匠人)과 공인(工人)들에게 나누어 주어 백토가 나는 곳에 가서 사서 쓰게 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9> 麟平大君 㴭 著『연행록 선집 Ⅲ』, 「연도기행」〝(서울: 경인문화사, 1976,)181쪽, 인평대군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천 백토 20포대를 가지고 온다. 어기를 더욱 정백(精白)하게 만들기 위 함이었다.
<20> 『承政院日記』 숙종 8년 8월 9일자의 기사에는 각지에서 채굴한 백토를 배합하여 자질(磁質)을 시험한 사료와 백토의 산지와 채굴에 따른 민폐에 관한 사료가 백여 건이 수록되어있으나, 항목별로 잘 정리되어 있으니 여기에 수록할 의미가 없기에 생략합니다.
粘土
<1> 성종 24년(1493) 5월 18일(신사) 2번째 기사, 유자광이 입부와 와부의 차이에 대해 아뢰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 유자광(柳子光)이 흙으로 사기(沙器)를 구워 만드는 입부(立釜)와 와부(臥釜)의 형상을 만들어 와서 아뢰기를, “와부(臥釜)는 불꽃이 그 안에서 가로 어지러워지므로, 사기가 찌그러지기 쉽습니다. 이제 오신손(吳愼孫)으로 말미암아 중국에서 입부(立釜)로 구워 만드는 방법을 들었는데, 이것이 매우 유리(有理)합니다. 입부는 불기운이 곧게 올라가므로, 구운 그릇이 다 평정(平正)합니다. 그러나 입부를 만들려면 이천(利川)의 점토(粘土)를 써야 하니, 부근의 고을을 시켜 흙으로 사기소(沙器所)에 날라 오게 하여 시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 成宗 17年(1486) 10月 28日(己亥) 1번째 기사, 시독관 민사건 등이 전탄의 공역 상황 등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독관(侍讀官) 민사건(閔師騫)이 아뢰기를,“신이 전에 전탄(箭灘)에 가서 공역(功役)을 보니, 그 둑을 쌓은 가로의 길이가 3백 척(尺)이었는데, 그 곁에 돌이 많으므로 이 돌을 써서 둑을 쌓기가 매우 쉬웠습니다. 또 도랑을 판 길이가 1만 8천여 척이었는데, 그 곳의 땅은 다 찰흙이고 모래와 돌이 없어 땅을 파서 물을 끌기에 편리하고, 삼지강(三支江)의 벌판에 이르러서는 지세(地勢)가 점점 낮아져서 일하기가 더욱 편리하였습니다. 또 이곳의 땅은 기름지니, 만약 이 도랑을 완성하면 백성이 이익을 받는 것이 어찌 작겠습니까? 또한 전날 비가 내리고 춥기는 하였으나, 인부 중에 동상(凍傷)에 걸린 자가 없었습니다
<3> 중종 25년(1530) 2월 5일(을축) 1번째 기사, 지서학 등을 부대시참할 것에 대하여 삼공에게 의논하게 하다. 그래서 국법을 명백히 보임으로써 그 폐단을 제거하고 싶으니, 삼공에게 의논하라. 그리고 사기(沙器)를 구워내는 백점토(白粘土) 를 전자에는 사현(沙峴)이나 충청도에서 가져다 쓰기도 했는데, 지금은 또 양근(楊根)에서 파다 쓰고 있다. 그런데 사옹원(司饔院)에서는 해마다 당령 수군(當領水軍)을 달라고 계청하는가 하면 병조에서는 그때마다 군인(軍人)이 없다고 아뢴다. 예전에는 사기장(沙器匠)이 실제로 많았었으나 지금은 반이나 도망하였다. 당령 수군을 많이 배정할 수는 없으니 50여 명을 항식(恒式)으로 삼아 정급(定給)할 것도 아울러 의논하라.
”[註 15722]백점토(白粘土) : 흰 찰흙임
<4> 숙종 3년(1677) 2월 28일(을해) 1번째 기사, 선왕의 능이 무너지자 위안제를 거행하고 개수하게 하다. 사초(莎草)가 무너지게 된 것은 대개 얼었다가 풀어지는 참에 급하게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진 때문이고, 흙을 조심해서 쌓지 않은 소치는 아닌 듯했습니다. 만일 그전 흙을 모두 제거하고 새 흙으로 다시 쌓으려면 실로 완고하게 해야 할 것인데, 또한 감히 절구질하여 쌓을 수가 없었고, 장인(匠人)들도 모두의 말이 ‘그전의 흙위에다 새 흙을 덧붙이면 반드시 잘 붙지도 않고 견고하게 되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다시 다른 방책이 없기에 점토(粘土)를 더 붙이면서 조금 가파른 형세를 낮추기만 했습니다. 섬돌 아래 묘방(卯方) 쪽 땅이 항시 물기가 많아 흙이 매우 질기 때문에, 비록 보토(補土)를 하고 굳게 쌓기는 했습니다마는, 견고하게 되지 않았을 듯합니다.”
<5> 정조 15년(1791) 9월 24일(병신) 2번째 기사, 강원 도사 윤치성이 돌아와 관동 지방의 민폐 4조항을 아뢰다. 첫째는 영서 지방에서 서울에 바치는 무명을 전부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허락하는 것이고, 둘째는 양구(楊口)에서 나는 백점토(白粘土)의 값을 올려주자는 것이고, 셋째는 홍천(洪川)의 귀보리 환자를 돈으로 갚도록 하자는 것이고, 넷째는 통천(通川)에서 말을 빌리는 돈을 탕감해주자는 것이었는데, 모두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