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도자기의 발생과 발전에 관한 기술 문제
이 자료는 필자가 책을 거듭 읽을 때마다의 생각을 첨기(添記)하였던 것입니다. 막상 자료를 제시하려고 보니 작성자인 본인도 초점(焦點)을 간추리기가 쉽지 않도록 산만하기에 주제별로 재편성 하였습니다. 재편 과정에 저자의 본지와 어긋나지나 않았나? 염려스럽습니다. 혹 잘 못 된 곳이 있으면 지적과 함께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라면서 목차에 따라 자료를 제시하겠습니다,
目次
一, 고려청자 발생 시 중국 도예 기술의 유입
1, 기존의 연구
2, 초기청자요지의 실상
3, 초기 청자요지가 서해안과 중서부 지방에 집중되고 신라 땅에는 없는 이유
4, 도에 가술의 전파 방지를 위한 요의 파괴
5. 고려청자의 재창조
資料
1, 기존의 연구
1) 일인 학자들의 주장
中尾万三 著, 『朝鮮高麗陶磁考』(東京: 學藝書院, 1935), 11쪽.
'南支那に於ける製陶の技術を輸入し, 製陶を行つたものが高麗の靑磁であり,又 白磁である。之を又高麗期より後, 李朝のものに就で見るなれば,明期の始め支那に於て,白磁靑花風のものが盛んであった時代に,玆に述べんとする高麗磁とは何等の關係もなく,支那の夫れを輸入しで 製陶したものが李朝の染付け, 或は辰砂手釉裏紅の如きものでぁる。”
中尾万三 著, 『朝鮮高麗陶磁考』(東京: 學藝書院, 1935), 17쪽.
“朝鮮半島の最南端である此の康津郡に,大窯址のあると言ふ事は,先づ第一に夫れが南支那浙江省地方に於ける製陶の術を承けたものである事を想はせるもである。”
中尾万三 著, 『朝鮮高麗陶磁考』(東京: 學藝書院, 1935), 21쪽.
“高麗朝の人が, 越州の人を呼んで此處に製陶場を開いたか, 或は越の人が此處に來つて製陶を創めたか, 是を知る由もないが, 恐らく越の人が此處に來て創めたものと想像される。”
井周一郞 著,『李朝染付』,「廣州官窯 道馬里窯」 (東京: 寶雲社刊,1942), 157쪽.
“明の陶技を取り入れたばかりのもの, いわゆる 模倣期の 古染とそれが旣に朝鮮の個性に同化して李朝染付として全く完成した頃の破片まで,殆ど李朝期に於けるやものの大部分の種類を網羅してゐるといっても差支ないと思 ふ。”
(우리 도자사를 연구한 일인들 중 일부 학자를 재외 하고는 연구자들 모두가 직·간접으로 중국도공의 입조(入朝)설을 주장하고 있으니 그들의 일일한 열거를 생략합니다.)
2) 주국인 학자의 주장
熊海堂 著,「朝鮮半島陶瓷技術對外交流史的比較硏究」,『考古歷史學志,靜山,金東鎬敎授停年退任紀念特輯』 (釜山: 東亞大學校博物館, 1992), 397-8쪽
“但窯爐的确己統一新羅時期的地下式轉向地面 嚴格地說 該窯是從窖穴窯向龍窯方向探索段階的新式窯爐 技術上受中國的影響 但中國的工匠沒有參與該窯場的生産也是非常明確的否則 靑磁製造方面一些重大的技術門題下會被怱略 如在窯爐結構上 窯爐兩側開門途中追加燃料的投柴孔的設置 匣鉢的利用....因爲在當時這對于中國工匠來說都是常識的要有技術者的交流與指點便能輕易解決的技術門題.
3) 한국 학자들의 주장
高裕燮 著, 『高麗の 靑磁』(東京:(株)寶雲舍. 1942), 21쪽
“當時の宋`遼に對する高麗の態度を知ることが出來るが, もし彼等の美術工藝品を輸入し,その工技を輸入せんとしたものとすれば如斯き時代にその可能性を想定するも一方法であろう。故中尾万三博士も大體この時代に高麗靑瓷の開窯を置かんとしたものの如く,
(역문, 당시 宋과 遼에 대한 고려의 태도를 알 수가 있듯이. 혹시 그들의 美術工藝品을 輸入할 때. 그 공법과 기술도 수입하고자 하였다면 이 시기라고 생각하는 것도 항 방법일 것이다. 故인이 된 中尾万三博士도 대체로 이 시기에 高麗靑瓷를 시작한 시기로 보고 있는 것과 같다.)
高裕燮 著, 秦弘燮 譯, 『高麗靑瓷』(서울: 三星美術文化財團, 1984), 32쪽.
“越州窯의 본을 받은 窯가 朝鮮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종래 우리들이 高麗靑瓷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개념을 전복시키는 것으로 저 수려한 비취靑磁가 일조에 완성된 것은 아니고 靑磁 燒成의 법이 朝鮮에 건너 와서부터도 이에 이르기에는 오히려 오랜 過渡期가 있었던 것을 짐작 하게 하는 귀중한 逸品이다.”
崔淳雨 著,「高麗時代의 磁器」,『韓國美術全集 9』(서울: 同和出版公舍. 1973), 1-9쪽.
“ 韓國陶藝는 10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三國時代와 統一新羅時代 陶藝가 지녀온 古墳文化的인 性格을 명쾌하게 벗어났다. ....이러한 비약적 발달의 바탕에는 이미 7세기 무렵으로부터 이루어진 鉛釉系 施釉陶器와 灰釉系 硬質施釉陶器의 오랜 傳統에 있었다. (중략) 中國의 晩唐 또는 五代의 靑瓷器術이 대략 두 갈래의 길을 타고 韓半島에 침투되어 왔다고 짐작된다.”
崔淳雨 著, 「高麗磁器의 編年』, 韓國의 美④ ,『靑磁』(서울: 中央日報社,1981), 195-6 쪽.
“唐末 五代의 中國 靑磁技術이 한국에 도입된 것은 대략 두 갈레의 길을 타고 移植되었다고 믿어지는데 그 한 系流는 山東半島를 포함한 북부 중국으로부터 黃海를 건너온 酸化焰系 또는 中性焰系의 北方系 靑磁技術이었다....다른 하나의 系流는 남부중국 抗州蠻 연안의 五代 宋初의 越州窯系 還元焰 靑磁技法이 海路를 타고 전라남도 康津을 비롯한 黃海의 남해안 지역에 들어온 것이다.”
李基白 著 井上秀雄 譯, 「高麗の文化と磁器」,『世界陶磁全集』, 18, 「高麗」 (東京: (株)小學館, 1976), 127-8쪽.
“高麗の陶工が中國に行って學んだとか, 中國の陶工がやってきて, その技術を傳えたとかしたことがあったとみる見解もあるほとである。(中略)このように,高麗時代における旺盛な中國文化の受容は,陶磁を含めて高麗文化の水準を高めることに,大いに貢獻したのである。”
鄭良謨 著,『韓國의 陶磁器』,「總論」(서울: 韓國美術叢書, 1991) 63쪽.
“中國 浙江省 越州靑磁의 영향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이 청자는 9세기부터 비롯되어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되며,”
鄭良謨 著,『韓國의 陶磁器』,「高麗靑磁」(서울: 韓國美術叢書, 1991) ,185쪽.
“9새기 전반 동북아 해상무역의 왕자였던 張寶皐의 해상활동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장보고에 의한 中國靑磁의 수입과 청자기술의 도입으로 서해안과 남해안에 청자번조의 기술이 전파되고 특히 강진은 장보고의 해상활동의 중심지였던 莞島와 가깝고 청자를 만들기에 적합한 조건,”
姜敬淑 著,「高麗時代 陶磁」,『韓國陶磁史』(서울: 一志社, 1989) 163쪽.
“오대(五代)의 새로운 문물이 도래되고 특히 後百濟의 견원이 중국 오월(吳越)과의 교류를 빈번히 하였으므로 월주(越州)지방의 청자기술이 도입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아마도 서남해안에 초기 청자 가마터의 분포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尹龍二 著, 「高麗時代 陶瓷」,『韓國陶瓷史 硏究』(서울: 文藝出版社, 1993), 151-152쪽
“중국을 통일해간 北宋에 의해 978년(太平戊寅)에 망하면서 급격히 쇠퇴하고 월주요의 기술이 이때를 전후하여 중국 남북방으로 확산되어...고려에서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越州窯의 靑磁匠人들을 후한 대접으로 대리고 와, 그 당시 청자제작을 갈망하고 있던 고려 왕실의 요구에 따라 청자제작의 기술을 가르쳐주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기술이 완숙될 때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李喜寬`崔健 共著,「高麗初期 靑磁生産體制의 變動과 그 背景」,『美術史學硏究』232號, 韓國美術史學會, 2001), 21쪽
“청자생산 초기에는 규모나 청자의 질에 있어서 강진지방과 어께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많은 지방요들이 한반도의 중부지방에서도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黃海道 峰泉郡 鳳岩里와 元山里 京畿道 陽州郡 釜谷里와 高揚市 元興洞 (후략)”
李喜寬`崔健 共著,「高麗初期 靑磁生産體制의 變動과 그 背景」,『美術史學硏究』232號 (韓國美術史學會, 2001), 24쪽.
“초기 청자는 中國 唐代後期(8세기 후기-9세기 전기)를 중심으로 유행했던 특별한 형식의 日彙底(玉壁底)碗, 마치 滿開하기 직전의 꽃송이 모양을 한 花瓣形楪匙 등이 중요 器種을 이루며....”
李喜寬`崔健 共著,「高麗初期 靑磁生産體制의 變動과 그 背景」『美術史學硏究』232號(韓國美術史學會, 2001)27쪽
“도자기에 필요한 원료 및 연료의 조달, 생산물의 운송, 인력 동원, 작업 공간 확보 등을 포함한 여러 필수적 조건들을 고려하면서 선정하는.....현재까지 알려진 대부분의 초기청자 요지들은 태토로 쓸 수 있는 堆積粘土가 풍부하며 水運을 이용한 생산물 수송이 유리한 해안이거나 江河口에 인접하고 있어서 대체로 이상적인 요지 환경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塼築窯와 土築窯 계열 요지의 위치와 주변 자연 환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는데...이는 선정기준이 달랐음을 의미하는 대목이 아닐까 한다.'
李喜寬`崔健 共著,「高麗初期 靑磁生産體制의 變動과 그 背景」『美術史學硏究』232號(韓國美術史學會, 2001)31쪽
“한 장소에서 100여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청자를 생산하여 거대한 퇴적층을 남긴 정착식 대규모형 요에서 그 막대한 량의 땔나무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조달하였을까...”
李喜寬`崔健 共著,「高麗初期 靑磁生産體制의 變動과 그 背景」『美術史學硏究』232號(韓國美術史學會, 2001)41족
“중서부 지방에 해안선을 따라 넓게 분포되어 있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 窯들은 하나같이 중국 越州窯系의 塼築窯로서 구조가 동일하였다.”
金載悅 著, 『高麗白磁의 硏究』(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문학 석사 학위논문, 1987), 66쪽
“해무리굽 碗 試片의 存在로 볼 때. 靑磁製作技術의 導入過程에서 形式上 월주요와 연결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위의 자료들이 기존의 주장들이다. 이 밖에도 더 많은 연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이 필자가 정리한 자료들이다.
위, 기존의 주장들을 요약하면 세 갈래로 집약된다.
첫째, 일인들의 주장은 중국 도자기와 닮았다는 것과 초기 청자요지가 서남해안에 집중 분포된 것이 중국 도예가 바다를 건너온 증거라고 하였다.
둘째, 중국학자는 窯道具등으로 보면 중국 도예 기술자가 왔던 것 같으나 생산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셋째, 한국학자들은 스스로 쌓은 연구가 없고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서 배웠으니 그들의 주장을 따르거나 인용하고 있다.(인용도 부호를 갖춘 인용은 아니다.)
일본인 연구자들은 중국이 기술의 비밀을 얼마나 엄격하게 지켰는지를 모를 리 없지만, 식민지 정책에 어용되었든 사람들이니 중국의 실정은 거론치 않은 채 청자 기술이 고려에 유입된 것으로 주장하여 우리 민족을 창의력 없는 민족으로 비하(卑下)시키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보면 초기에는 유품이 중국의 것과 닮았다는 이유를 들다가. 다음에는 초기 청자 요지들이 서남해안에 집중된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를 증거로 삼고 있다. 일인 학자들 중에 柳宗悅, 小田省吾, 野守 健같은 사람들은 중국 도공의 입조설(入朝說)은 입에 담지도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柳宗悅은 중국과 반도는 풍속이 다르고 풍토가 다름에 따라 인심이 다르니 예술의 취향도 다르다하고 우리 민족의 창의성을 높이 평하였고, 小田省吾는 한국도자기는 新羅燒, 高麗燒, 朝鮮燒로 구별되어야 하는데 新羅燒에 대해서는 왜 연구가 없느냐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일본인들이 도자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왜곡한 주장들을 답습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비판 없이 인용하고 있을 뿐 새로운 연구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李喜寬과`崔健이 共著한 「高麗初期 靑磁生産體制의 變動과 그 背景」『美術史學硏究』232號에서 처음으로 도자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 볼 의문점을 제시되고 이다. 이제는 해방된 지도 60년이 지났으니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 우리 문화를 우리 손으로 다듬고 가꾸어 일제가 왜곡시킨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기술의 전승은 주[授與}는 나라가 있고 받{受惠}은 나라가 있어야 성립되는 것인데 기술을 주는 나라(중국)의 사정은 감안하지도 않고 기술을 받은 나라(고려)의 역사를 왜곡시키려고 중국 기술을 전승했다고 하면 이는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으니 학문적 연구라고 할 수가 없다,
당시의 도자기 기술은 지금의 인공위성을 만드는 기술만큼이나 어려운 기술이었을 것이고, 나라에 미치는 경제적 영향도 컷을 것이다. 당시의 중국은 도자기 수출로 세계시장을 석권하였고, 그 이익으로 국부를 이룬 원천 기술이다. 그러니 도자기 수출의 경쟁국이 등장하지나 않을까 혈안이 되었을 탠데, 그런 중요한 기술을 이유 없이 고려에 전수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전수했다면 반드시 자국 (당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가 국론으로 결정한 중대한 문제였을 것이다.
고려청자의 시원을 논하려면 외부기술의 도입 이전에 우리의 전통 기술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전래의 토기를 제작하던 기술을 살펴보면 統一新羅時代에는 低火度燒成의鉛釉陶器가 있고, 高火度燒成의 硬質土器와 綠釉를 施釉한 陶器가 있다. 그러니 이렇게 축적된 기술의 바탕위에 중국에서 상품으로 들어온 자기를 보고 비약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외부 기술의 유입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초기 청자 요지의 실상이 외부기술의 유입을 부정할 수 없는 단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 단서란
첫째, 고려 초기 청자 요지의 발굴에서 중국의 다양한 요도구(窯道具)와 유품이 나오는 이유. 둘째, 고려 초기의 청자 요지에 전축요(塼築窯)와 토축요(土築窯)가 존재하는 이유. 셋째, 전축요지는 대규모와 소규모의 두 형식이 있는 이유. 넷째, 대규모 전축요지가 서해안과 중⋅서부지방에 집중된 이유. 다섯째, 대규모 전축요지가 신라 땅에는 없는 이유. 여섯째, 대규모 전축요지가 파괴된 이유 등이다. 신라 토기의 요지가 발굴 될 수도 있다는 미진한 여운이 있으나 발굴된다고 하더라도 塼築窯가 아닐 확률이 높고 또 중국식 窯道具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초기청자 요지의 실상
李喜寬`崔健 共著,「高麗初期 靑磁生産體制의 變動과 그 背景」『美術史學硏究』232號(韓國美術史學會, 2001)25-6쪽
塼築窯 系列
1. 平安道 江西郡 芿次面 二里 靑磁窯址
2. 黃海南道 峰泉郡 鳳岩里 靑磁窯址(대규모 2개소)
3. 黃海南道 峰泉郡 圓山里 靑磁窯址(대규모 3개소)
4. 京畿道 陽州郡 長興面 釜谷里 靑瓷窯址(소규모 3개소)
5. 京畿道 高陽市 元興洞 釜谷里 靑瓷窯址(대규모 1개소)
6. 京畿道 始興郡 芳山洞 靑瓷,白磁窯址(대규모 2개소, 소규모 1개소)
7. 京畿道 麗州郡 北內面 중암리 白磁窯址(소규모 1개소)
8. 京畿道 龍仁郡 二東面 西里 白磁, 靑瓷窯址(대규모 2개소)
9. 忠淸南道 瑞山郡 聖淵面 梧沙里 靑磁窯址(대규모 1 소규모1개소)
10.全羅北道 鎭安郡 聖壽面 道通里 靑磁窯址(소규모 6개소)
11.全羅北道 高敞郡 雅山面 龍溪里, 盤岩里 靑磁窯址(대규모 2개소)
12.慶尙北道 漆谷郡 枝川面 昌坪里 및 大邱市 東區 眞仁洞 靑磁 黑磁 窯址(소규모 3개소)
土築窯 系列
13. 全羅南道 海南郡 花園面 新德里. 靑磁 黑磁窯址 (소규모 약 30개소)
14. 全羅南道 高興郡 豆原面 雲垈里. 靑磁 黑磁窯址 (소규모 2개소)
15. 全羅南道 康津郡 大口面 龍雲里. 佳栗里. 私堂里. 靑磁窯址 (소규모 46개소)
全羅南道 康津郡 七良面 三興里 靑磁窯址 (소규모 3개소)
16. 全羅南道 長興郡 蓉山面 豊吉里 靑磁窯址 (소규모 1개소)
위에 제시한 바와 같이,초기 청자 요지 가운데 전축요 계열은 주로 우리나라 중서부의 대부분 지역에 폭 넓게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요지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전축요의 특징을 뚜렷하게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西里와 龍溪里 요지와 같이 처음에는 규모가 큰 전축요로 시작하였지만 그 후 규모가 작아지면서 토축요로 전환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窯場의 要件>
李喜寬`崔健 共著,「高麗初期 靑磁生産體制의 變動과 그 背景」『美術史學硏究』232號(韓國美術史學會, 2001)27쪽
“도자기에 필요한 원료 및 연료의 조달, 생산물의 운송,인력 동원, 작업 공간 확보 등을 포함한 여러 필수적 조건들을 고려하면서 선정하는 ...현재까지 알려진 대부분의 초기청자 요지들은 태토로 쓸 수 있는 堆積粘土가 풍부하며 수운을 이용한 생산물 수송이 유리한 해안가나 江河口에 인접하고 있어서 대체로 이상적인 요지 환경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塼築窯와 土築窯 계열 요지의 위치와 주변 자연 환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는데...이는 선정기준이 달랐음을 의미하는 대목이 아닐까 한다.'
이 논문(李喜寬`崔健 共著,「高麗初期 靑磁生産體制의 變動과 그 背景」)에서 현재의 연구로는 해결이 안 되는 문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1) 대형전축요가 왜 파괴되었을까?
(2) 요의 위치를 왜 이런 곳에 정하였을까?
(3) 대형전축요를 정착하고 원료(태토와 땔나무)조달은 어떻게 했을까?
(4) 전축요가 중서부에 설치된 이유?
그러나 필자가 한 가지를 더 추가 한다면 (5)기술이 일시에 퇴화(退化)된 이유?
(양질 자기를 굽던 기술이 일시에 퇴화한 것은 거기에 종사하던 장인들이 일시에 죽임을 당했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동한 탓으로 밖에 해석 할 수가 없다.) 다행히 역사서에 당나라로 二十餘萬名을 압송 해간 기록이 있으니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려청자 발생에 중국 도예 기술이 유입되었다는 문제를 고구(考究)하려면 도예 기술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국가적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의 도예 기술은 중국 경제의 수입원이 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기술을 아무런 조건 없이 고려에 전수할 리가 없다. 전수하였다면 반드시 자국(당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수여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양국(高麗와 唐)간에 이 기술을 걸고 한판 도박이 벌어졌을 것이니, 두 나라 사이의 역사에서 그럴 만한 사건을 찾아보아야 한다. 언재였을까?
唐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하다가 나라자체가 무너진 隨나라의 뒤를 이은 나라였다. 그러니 唐에게 북방의 고구려는 항상 위험하고 불안한 존재였지만 만만치도 않았다. 그러니 북방의 경계를 늦출 수가 없는 처지였다. 때마침 신라의 동맹 제의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당은 동맹을 맺고 고구려 침공에 앞서 백재를 공략하기로 하고 나·당 연합군을 편성 하였다. 동맹군은 신라가 5만 당이 13만 대군오로 편성하였다. 당군(唐軍)은 산동반도에서 함선으로 바다를 건너 약속한 날 백재를 공략하였다. 대군이 바다를 건너자니 군수 장비도 중량을 고려해야할 처지였으니, 군인 개개인의 장비도 최소화하여 무개를 줄여야했다. 그 방안으로 군인들의 식기는 현지에서 만들어 공급할 계획을 세우고 공병을 모집할 때 그 일원으로 도공을 모집하여 전시에는 전투하고 점령지에서는 식기(도자기)를 생산 공급할 것을 전재로 도공을 선발하여 참전하였다. 이 계획이 장차 도예 기술 전파의 계기가 되리라고는 생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당은 서로가 아쉬워 동맹을 했었지만 당은 동맹을 맺을 당시부터 백재와 고구려뿐만이 아니고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전체를 정복할 계획이었다. 이는 역사기록에 없다고 하더라도 나·당 전쟁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3, 초기 청자요지가 서해안과 중서부 지방에 집중되고 신라 땅에는 없는 이유
기존의 연구에서는 고려청자의 기술이 중국에서 서해로 건너왔기 때문에 요지들이 서남해안에 집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로 보면 도예 기술은 나·당 전쟁 때 당나라의 군사의 작전으로 운영되었던 요지이기 때문에 백재와 고구려 땅에만 설치되었든 것이다.
나·당 연합군이 서기 660년에 백재를 정복하였다. 唐나라는 백재의 영토에 웅진도호부(雄鎭都護府)를 설치하고 주둔군(駐屯軍)을 두었다. 그 군의 보호가 가능한 지역 내에 요를 축조하여 생산된 도자기를 군에 납품하면서 백자에 관한 연구를 성공한 듯하다.
백재의 영토가 서해 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청자요가 서해안에 집중 되었고, 주둔군의 보호 영역을 벗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차 고구려를 침공할 때를 대비하여 해로 수송이 가능한 장소를 선정하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청자요지가 서해에 집중된 것인데, 지금의 연구에서는 남해안을 포함하여 서남해안에 청자요지가 집중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것은 강진과 유천리의 토축요(청자)를 대형전축요와 같은 시기의 요적으로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의 대형 전축요와 토축요의 활동 시기는 상당한 시차가 있을 것이다.
나·당 연합군은 668년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백재 침공 후 그 때 까지는 8년간의 여유 시간이 있다. 이 기간에 당의 도공들은 군용 식기를 만들어 군납을 하면서 백자 연구에 성공 한 것으로 보인다. 연합군이 고구려를 정복하고 그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도공들은 주둔군의 보호 하에 백토가 많은 중서부 자방에 요를 설치하였다. 이런 이유로 중서부지방에도 전축요가 축조되었든 것이다. 따라서 당나라군이 점령 못한 신라 땅에는 초기청자요인 전축요는 한기도 없다. 이는 초기 청자를 생산하던 전축요는 당나라가 군사 작전으로 운영되었던 요라는 증거가 된다. 실정이 이러하나 현재의 연구는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되었던 요로 해석을 하고 있으니 어느 것 하나 재대로 해석되는 것 없다.
4, 도에 가술의 전파 방지를 위한 요의 파괴
한반도를 송두리째 정복하려는 당이 신라에게 패하였다. 작전 계획이 빗나가 뜻밖의 패전으로 철수하게 된 당나라 군인들은 전쟁에는 패했어도 도예기술의 전파는 막고자 자기(당나라 도공)들이 축조한 전축요는 파괴하고 요도구는 수거하고 산같이 싸인 퇴적물은 어쩔 도리가 없으니 매몰하여 물적 증거를 없애고, 도자기 생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압송하여 도예의 흔적을 철저히 지우고 떠났다. 당나라가 철수하면서 백재와 고구려 백성 20여만 명을 압송해갔다. 그 중에는 도공들도 상당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전쟁의 부산물로 들어오게 된 도예 기술은 전파가 목적이 아니었으니 들어온 요도구는 못쓰게 된 것과 요는 파괴 되었으니 흔적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땅에서 청자를 생산한 기는 7세기 중엽이었다. 하지만 그때 만든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이였고 기술도 그들의 기술이었다.
신라는 17년간의 장기전 치루고 삼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소국이 대국을 상대로 장기전을 치렀으니 국력회복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 되었을 것이다. 전쟁와중에 도예기술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들이 물러가면서 기술을 철저히 숨기고 떠났으니 이때 들어온 기술을 바탕으로 청자가 생겨났다면, 매몰된 요적(窯跡)을 언재 누가 어떤 계기로 발견하였고 또 어떤 시행착오를 거처 고려청자가 재창조되었는지 현재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 토기 기술이 이미 경질토기를 생산한 경험이 있고 녹유를 시유한 경험이 있었으니 청자 생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5, 고려청자의 재창조
당나라 군대가 도예 기술을 철저히 지우고 떠난 뒤 242년이 지난 918년에 고려왕조가 건국을 선포한다, 지금은 고려청자라는 이름으로 연구되고 있지만 당나라 군인들이 매몰하고 떠났던 요지가 발견되어 그를 토대로 청자가 재창조 되었는지 그와는 별개로 신라토기의 기술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할 기회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초기청자요지의 실태를 보면 대형전축요 위에 축소된 소형전축요가 있고 다시 토축요로의 변형을 거친 흔적이 있으니 나·당 전쟁 당시 기술이 전래된 사실을 부인할 사료는 없는 듯하다,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를 보면 아래의 圖1,2,3의 靑磁는 년대가 확실한 자료이다.
崔淳雨 著, 『世界陶磁全集』,18, 「高麗,」圖1,「靑磁瓜形甁」.(12世紀 前半)(東京:(株)小學館,1978), 10쪽. 韓國國立中央博物館
“京畿道長湍郡長道面長陵里にある高麗仁宗王(在位1123-46)の長陵から發見された一群の靑磁の中の一つである。この一括遺品は,皇統6年銘(1146)のある仁宗王の諡冊とともに出土したもので,高麗靑磁の中ても由緖ぶかいものである。”
崔淳雨 著, 『世界陶磁全集』,18, 「高麗,」圖2,「靑磁皿」(12世紀 前半)(東京:(株)小學館,1978), 10쪽. 韓國國立中央博物館”
“京畿道長湍郡長道面 長陵里にある高麗仁宗王陵から,仁宗王諡冊とともに出土したと推
定される遺物中の一つである(후략)
崔淳雨 著, 『世界陶磁全集』,18, 「高麗,」圖3,「靑磁輪花皿」(12世紀 前半)(東京:(株)小學館,1978), 10쪽. 韓國國立中央博物館
“高麗仁宗王陵から出土した靑磁の一括遺品のもつ釉胎の特徵と平底皿の技法が類似している.”
다음에 제시된 자료는 실물을 접할 수 없으니 도면으로 비교하였다. 여기에 제시한 고려 백자와 중국의 수·당 백는 기년명이 확실한 유품들은 아니다, 고려 백자는 12세기 전반의 유품들이고, 수·당 백자는 7-8세기의 유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양국 유품의 제조 시기는 400-500년의 시차가 있다. 도면으로 보는 것이기는 하나 구별이 어렵다. 따라서 고려백자로 등재된 유품이 나·당 전쟁당시에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한다.
鄭良謨 著, 『世界陶磁全集』,18,「高麗,」圖99,「白磁蓮唐草文皿」(12世紀 前半)(東京:(株)小學館,1978), 104쪽. 韓國國立中央博物館
“器形が銳く,器壁は薄く,とくに輕快に外反した側斜面が,下部で急に曲がって底部となるとは,古式であるが,底部に別な高台を造出していない。”
鄭良謨 著, 『世界陶磁全集』,18,「高麗,」도102,「白磁甁」(12世紀 初)(東京:(株)小學
館,1978), 107쪽. 韓國國立中央博物館.
“口部はやや厚く力强い,頸は明確で,肩部は澎湃としている。線の變化のない豊滿な胴部はずっとせばまって底に至っている。...”
長谷部樂爾 著, 『世界陶磁全集』,11,「隋·唐,」圖21,「白磁壺」(7·8世紀)(東京:(株)小學館,1976), 34쪽.
“器形· 作調とも唐白磁の典型といえるもの,まるく張った胴は,ほとんど球形に近い感じがするが,'
長谷部樂爾 著, 『世界陶磁全集』,11,「隋·唐,」圖23,「白磁杯盤」(7世紀)(東京:(株)小學館,1976), 36쪽.
“數個の杯を平たい盤にのせて供することは,昔も今も變わらない用法であその兩者を陶磁器でつくり,副葬した例は,すでに南北朝の遺跡からたくさん發見されている。,,,,”
고려청자의 시원 연구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희귀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면 초기청자요적으로 대형, 소형의 전축요와 토축요 등의 유적이 있으니 이 유적들을 학술적으로 발굴하면 보다 과학적인 입증자료를 확보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연구의 근거가 확보되면 지금의 연구처럼 역사적 개연성도 과학적 근거도 없이 역사를 왜곡하여 조상들의 창의성을 짓밟는 일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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