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소식         자유게시판

고려도경의 오역(誤譯)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724
고려백자에 관한 사료 및 연구 성과
『고려도경』의 오역(誤譯)

우리 도자사 연구자 중에는 사료가 있어도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고려자기에는 사료 자체가 희귀하다. 그런 가운데 유일한 사료가 宋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왔던 徐兢이 쓴 『高麗圖經』이 유일한 사료이다.
宋나라 徽宗이 고려 睿宗의 조위(弔慰)를 겸한 국신사를 보낸 때가 仁宗 원년(1123)년이다. 徐兢은 사신단 중의 한 사람이었다.
徐兢이 사절(使節)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 달 동안 서경에 머물며 수집한 자료로『高麗圖經』을 책으로 발간한 것은 宣和 6년 (1124)8월 이다. 그러니 徐兢의 학문적 능력을 인정해야하는 사료이다 . 徐兢이 사절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짧은 시간에 우리 문화 전반의 자료를 수집하였으니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를 비판할 자료가 없으니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실정이다.
외국 사람이 쓴 자료이지만, 우리에게는 유일한 자료이니 역사적 사실과 부합 되는지, 대국 사신이라는 우월감에서 편견으로 서술하지는 않았는지를 살펴야 하지만 그에 앞서 한문으로 쓰인 『高麗圖經』을 한글로 국역하는 과정에 오역된 부분은 없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高麗圖經』에는 우리의 문화 전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도자기에 대한 기록은 第三十卷에서 第三十二卷에 자세하게 기술되어있는데 그 중 第三十二卷「器皿三」의 陶尊 에 관한 번역에는 문장 해석에도 이의가 있고, 도자사적 입장에서는 이해가 미치지 않는 부분이 있어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역사 사료는 어떤 경우에도 정확한 번역과 해석이 요구되지만 특히 이『高麗圖經』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유는『高麗圖經』은 고려 도자기에 대하는 유일한 사료로 다른 사료가 없으니 이를 분석 비판할 객관적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해석 여하에 따라 12세기(1123)년 당시의 도자기의 종류가 청자뿐이었는지 백자도 함께 있었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번역으로는 12세기(『高麗圖經』당시)에는 청자만 있고 백자는 없는 것으로 번역 되어있다. 이에 대하여 필자의 견해가 다르니 다시 검토하고자『高麗圖經』第三十二卷「器皿三」의 陶尊에 관한 원문과 역문을 살피고자 한다.

徐 兢 著,『高麗圖經』, 第三十二卷「器皿三, 陶尊」(서울:고전국역총서119, 민족문화추진회. 1978), 원문 78쪽, 역문 182쪽.
(原文) “ 陶器色之青者。麗人謂之翡色。近年以來。制作工巧。色澤尤佳。酒尊之狀如瓜。上有小蓋。面爲荷花伏鴨之形。復能作盌,楪,桮,甌,花甁,湯琖。皆竊放定器制度。故略而不圖。以酒尊異於他器。特著之。”
(역문)(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년의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도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 또 주발ㆍ접시ㆍ술잔ㆍ사발ㆍ꽃병ㆍ탕잔(湯琖)도 만들 수 있었으나 모두 정기제도(定器制度)를 모방한 것들이기 때문에 생략하여 그리지도 않고, 술그릇만은 다른 그릇과 다르기 때문에 특히 드러내었다.)
주10). 정기제도(定器制度) : 중국의 일정한 형태의 기물을 만드는 법칙을 말한 것이다. 라고 번역 되었다.

위의 번역에 대하여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 첫째는 원문의 초두에 “陶器色之青者。麗人謂之翡色”을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라고 하였다. 그러면 푸른색 말고 다른 색의 도기도 이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뒤에 이어지는 문장에 “주발ㆍ접시ㆍ술잔ㆍ사발ㆍ꽃병ㆍ탕잔(湯琖)도 만들 수 있었으나 모두 정기제도(定器制度)를 모방한 것들이기 때문에 생략하여” 라고 하였다. 여기에 생략된 도기 즉 “주발ㆍ접시ㆍ술잔ㆍ사발ㆍ꽃병ㆍ탕잔(湯琖) 등은 비색이 아닌 색의 도기(필자는 백자라고 생각한다.)라야 문장의 대구가 맞다. 그런데 번역의 <주10> 에는 중국의 일정한 형태의 기물을 만드는 법칙을 말한 것이다. 라고 하여 청자인지 백자인지 애매한 해석을 하였고. 도자사 학계에서는 청자로 이해하고 그 해석위에 연구를 보태고 있다.

둘째는 復能作에 대한 번역이다. 復能作을 “만들 수 있었으나”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문장에는 “모두 정기제도(定器制度)를 모방한 것들이기 때문에 생략하여 그리지도 않고, 라고 서술하여, 만든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따라서 復能作을 “만들 수 있었으나”가 아니고 “만들었으나”로 번역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한문학자가 번역하였을 것 인데 토를 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는 말 자체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陶爐에 관한 조항은 위의 陶尊의 조항을 해석하는데 관련이 있다고 보이기에 예시한다.

徐 兢 著,『高麗圖經』,第三十二卷「器皿三, 陶爐」(서울:『고전국역총서119,민족문화추진회, 1978),원문 78, 역문 182쪽.
(原文)“狻猊出香。亦翡色也。上爲蹲獸。下有仰蓮。以承之。諸器。惟此物。最精絶。其餘。則越州古祕色。汝州新窯器。大槩相類
(역문)(산예출향(狻猊出香 <사자 꼴을 한 도제 향로의 이름> ) 역시 비색(翡色)인데, 위에는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앙련화(仰蓮花)가 있어서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만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고비색(古秘色)이나 여주(汝州)의 신요기(新窯器)와 대체로 유사하다. )
주11). 월주요: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浙江省紹興縣).주12). 고비색(古秘色)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전부터 전해진 자기의 신비한 빛깔. 청색 계통.주13). 여요(汝窯)지금의 중국 하남성 임여현(河南省臨汝縣).주14). 신요기(新窯器)새로 개발된 도요에서 구워낸 기물이라는 뜻. 당시 중국에서도 고려자기와 비슷한 빛깔의 자기를 개발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던 것이다.
주15), 대체로 유사하다. 산예출향 같은 고려자기는 당시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특이한 것이었음을 뜻하는 말

위에서 원문과 역문을 살펴보았다. 徐兢이 쓴『高麗圖經』의 문장에 모순을 지적하면 중국 물건과 닮은 물건은 절방(竊放=몰래 훔쳐서 만든 것)이라 기술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없는 독특한 물건은 따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중국에 없는 물건은 어느 나라의 것을 절방하였다는 말인가? 모본(模本) 없이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창의성을 가진 민족만의 독창성이다. 그러니 중국 물건과 닮은 것도 절방이 아니고 독자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니 고려자기는 중국을 모방한 것이 아니고 독창적인 창작품이다. 그럼 왜 중국 기형과 닮았을까? 라고 의심을 한다면, 그것은 중국 물건이 하사품으로 혹은 상품으로 유입되었을 때 그 그릇의 기형이 장인의 머리에 입력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독창성을 부인 한다면 중국 물건과 달지 않은 산예출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는 독자적으로 창작된 것이 라고 설명할 수밖에 달리는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 徐兢의 문장 구성에는 상세한 설명을 생략할 때는 어느 요의 것과 닮았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니 定器制度도 어느 요의 것을 닮았다는 말일 텐데 역문에서는 ( <주 10> 에서와 같이 중국의 일정한 형태의 기물을 만드는 법칙을 말한 것이다.) 라고 해석하고 있다.

徐兢은 宋나라 사람이니 송나라의 그릇이 눈에 익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定器制度는 宋의 관요인 定窯의 재도를 닮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럼 定窯에 관한 연구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佐藤雅彦 著,『世界陶磁全集』,12卷, 「宋の白磁」(東京: (株)小學館, 1977), 157쪽.
“전술한 바와 같이 定窯의 요지를 발굴하여 파편을 검증한 결과 五代, 宋初의 定窯에서 생산된 것임이 판명되었다. 필시 조정에서 만 쓰는 것들뿐이니 다른 요들과 구별하고자 붙어진 이름일 것이다.
(“前述の定窯窯址の發掘でこの破片が檢出された結果,五代·宋初の定窯の産であることが判明した。おそらく朝廷で用いるものだけに,他と區別してこの銘をつけたのであろう。”)

佐藤雅彦 著,『世界陶磁全集』,12卷, 「宋の白磁」(東京: (株)小學館,1977), 160쪽
“北宋은 1125년 金나라의 침공으로 인하여, 浙江의 抗州로 南渡하여, 南宋의 代가 시작된다. 그 때까지 北方에서 도자기를 생산하던 窯들 중 磁州窯와 均窯는 그 뒤에도 窯業을 계속하였으나,定窯는 이時點에서 廢窯가 된 듯하다.”
(“北宋は1125年に金の侵攻を受けて,浙江の抗州に南渡し,南宋の代となる。それまで北方で窯煙を上けていた窯のうち,磁州窯や均窯はその後も業を續けるが,定窯はその時點で廢窯となったらしい。”)

定窯는 宋나라의 관요였고 백자를 만들던 요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高麗圖經』의 서술에서 또 하나 주의 깊게 살펴야할 문제는 徐兢이 고려에 와서 그릇을 보니 자기 나라의 것과 닮은 것도 있지만 닮지 않은 것도 있었다. 닮지 않은 것은 려인(麗人)들의 창작품이니 독창성을 칭찬의 글을 남겼어야 평정심(平正心)으로 남의 나라 문화를 이해한 흔적일 텐데 닮은 것은 “皆竊放定器制度”라고 하였고, 우리는 모방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중국 사람이 자기내 것과 닮았다고 느꼈으면 '훔칠절‘(竊)자를 쓸 것이 아니라 ’닮을 사(似)자‘를 썼어야 하고 우리의 번역도 모방이 아니라 닮았다고 되었어야 옳을 것이다. 그림(繪畫)과 같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可視的)인 것을 모사하여도 표면의 형상이 모사될 뿐 작가의 사상은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모조품으로 머문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로 만들어진 도자기는 아무리 아름다운 그릇을 보여줘도 축적 된 기술과 경험 없이 모방이 불가능하다.
그릇의 외형이 닮았다는 것은 땅을 밟고, 하늘을 이고 사는 사람의 생각은 다 비슷한 것이다.모방을 광의로 해석하면 닯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즉 밥이나 국을 담으려면 위쪽은 열리고 아래쪽은 닫쳐 있어야 물건이 담기는 이치는 세계 어느 나라의 그릇도 같은 원리의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다. 문래를 돌려 그릇을 만들자면 그릇이 둥글어지는 것은 기공(技工)상의 이치이다. 다만 크기와 색채와 소재가 다르나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로 닮아갈 것이다.

고려와 송나라는 같은 불교국가로서 평화롭게 교류하였으니 송나라 도자기가 사은품으로 혹은 상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 형태가 재래의 것 보다 아름답고 제작이 공정이 간편할 것으로 장인들의 눈에 비쳤다면 그것을 참고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든 것이 서로 닮아가는 것이고, 문화교류에서 생기는 발전이지 이를 두고 절방(竊放)이라고 서술한 것은 대국 사신의 오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高麗圖經』의 번역에는 청자만 있고 백자는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면 당시 국민들의 색채에 대한 감각은 어땠는지를 복식(服飾)제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徐兢 著,『高麗圖經』,第二十卷,「婦人」(서울: 고전국역총서 119,민족문화추진회, 1978), 125쪽.
(原文)“臣聞。三韓衣服之制。不聞染色。唯以花文爲禁。故有御史。稽察民服文羅花綾者。斷罪罰物。民庶遵守。不敢慢令。舊俗女子之服。白紵黃裳。上自公族貴家。下及民庶妻妾。”
(역문)(삼한(三韓)의 의복제도는 염색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꽃무늬 넣는 것을 금제(禁制)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사(御使)를 두어 백성의 옷을 살펴 무늬를 넣은 비단과 꽃무늬를 넣은 비단을 입고 있는 여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죄주고 물건을 압수함으로 백성이 잘 지키어 감히 어기는 자가 없다. 옛 풍속에 여자의 옷은 흰 모시 노랑 치마인데 위로는 왕가의 친척과 귀한 집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 까지 한 모양이어서 구별이 없다.)

이와 같이『高麗圖經』당시(1123) 고려국민들의 의복은 흰색 옷을 입었는데 노랑 치마도 입었다. 그러니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다채로운 의상으로 살았으니 생활 용기인 도자기도 청자만 쓴 것이 아니라 백자도 함께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자사 학계에서는『高麗圖經』에 거론된 도자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연구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고려백자에 관하여는 비교적 자세한 연구가 일인 학자의 글에 이기에 참고하고자 한다.)

野守 健 著,「白磁」,『高麗陶磁の 硏究』(東京:圖書刊行會, 1972)
41쪽.
“從來發見されてゐる白磁の中で確實に高麗に於て燒成されたものと見做されるものは極めて稀であるが,李王家美術館に數點, 朝鮮總督府博物館に數點, 平壤府立博物館に一點, 保存され, 又 京城· 內藤定一郞· 東京·小池厚之助 兩氏も一點づつ所藏されてゐる。此等の遺品と私が全羅北道扶安郡保安面柳川里の陶窯址に於いで蒐集した確實な資料をもって考察すると, 靑磁及 靑磁象嵌 最盛期に屬 すべきものと 麗末に屬すべきものとがある。”
 
野守 健 著,「白磁」,『高麗陶磁の 硏究』(東京:圖書刊行會,1982)
42-43쪽.
“京畿道開豊郡嶺北面月古里 宮女洞 古墳から承安3年(高麗 第20代 神宗元年 西紀 1197년)在銘 宋淸子墓誌附石棺に伴出せる遺品の中の一つである。此の水甁は高さ 9寸 二分五厘, 胎土は白色, 堅硬, 稍粗笨で中に僅かはではあるが 微細な黑點が存在し, 釉面粗にて帶靑灰白色を呈してゐる。釉藥竝に胎土は保安面柳川里12號陶窯址出土のものより洗練さゐないが彼の先驅をなすものと想像される。”
 
野守 健 著,「白磁」,『高麗陶磁の 硏究』(東京 :圖書刊行會,972)
46-49쪽.
“洪武 24年 銘の 存在するものがある。1942년 10월 6일 江原道産業課末煇里出張所に於いて,金剛山放火線開鑿工事中, 淮楊郡長楊面長淵里なる金剛山月出峰に於いて偶然石函中から銀製鍍金舍利塔· 同舍利用龕 銀製耳搔 ,靑銅盌 等と共に白磁盌四個 白磁香爐一個等が發見され,而も白磁盌に左の文字が陰刻されたものがあった。白磁盌の外面に施された刻字 “大明洪武 二十四年辛未 四月日立願 回願砂合 造幽谷 自釋迦如來 入滅經二千餘年 大明洪武 隱月菴與 ⎕松軒侍中 ⎕余万人 同發哲願 供藏金剛山 直侍彌勒世 不建三會時 重開膽禮佛 此願堅固 佛祖證明 ”
白磁盌の內面に施された刻字,
“自釋尊入滅經二千四百余年大明洪武二十四辛未五月日月菴⎕⎕侍中李成桂万人同發哲願⎕藏金剛山侍中彌勒出世奉以侍人助揚眞化同成佛徒此願堅固佛祖訂明辛未五月日誌同發願野納月菴同願施主門下侍中李成桂同願三韓國大夫人康氏同願樂浪郡夫人金氏⎕同願江陽群夫人李氏妙淸同願興海郡夫人裴氏同發願余多⎕不祿侍彌勒三會⎕ 膽禮同成正⎕崑盧峯舍利安遊記”
又, 其の器底の高台の 周圍に施された刻字
“辛未四月日 防山沙器匠 沈意 同發願比丘 信寬 “
野守 健 著,「白磁」,『高麗陶磁の 硏究』(東京 :圖書刊行會,1972)
49쪽. <高麗 白磁의 年代 推定 資料>
“洪武二十四年は高麗恭愍王の末年で, 朝鮮太祖の建國の前年に當り朝鮮太祖が所願を以て之を納めたこどが分る。上に述べた樣に靑磁及靑磁象嵌の最盛期に燒成されたものと,麗末に屬するもとが明かになったが,其の中間に屬するものに至っては未だ年代を推定し得る遺品が發見されで居ないので現在の所遺憾なきら詳かでない...高麗圖經に,白磁に就て靑磁象嵌と同じく一言も觸れてゐない故, 其の當時には未だ工夫されてゐなかったと想像されるまだ旣に述べた第十七代仁宗(1122-1146)の長陵, 第十八代毅宗朝(1146-1170)に營造された文公墳墓或は第十九代明宗(1170-1197)の智陵らがら高麗の燒成と認むべき白磁器が一點も發見されでなく,唯,文公墳墓から支那燒成の白磁器三點が出土してゐるのみである。”

野守 健 著,「白磁」,『高麗陶磁 の 硏究』(東京 圖書刊行會,972)
50쪽.
“全羅北道保安郡柳川里第12陶瓷窯址から辰砂を塗抹した破片が白磁·白磁象嵌竝に靑磁最盛期のものと同時に同一場所から出土してをり尙ほ李王家美術館所藏品の中にも白磁象嵌に辰砂を施したものがある...靑磁及靑磁象嵌は明宗の智陵から發見されたものに類似してゐるから,先づ以後に遠くない時期に燒成されたことが窺知される。”
姜敬淑 著,「高麗時代 陶磁」,『韓國陶磁史』(서울: 一志社, 1989), 151쪽.
“徐兢이 쓴「高麗陶經」에 여러 가지 청자에 관한 기술을 남기고 있다. 또 徐兢의 저술을 뒷받침해 주는 실물, 즉 인종 장릉에서 출토된 청자와 일괄 유품이 있으며 비색 청자가 완성되는 시기가 바로 인종 때라는 사실만으로도 인종은 시기구분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 ”

姜敬淑 著,「高麗時代 陶磁」,『韓國陶磁史』(서울, 一志社,1989), 153쪽
“「高麗陶經」에 기록을 남긴 시기로 보아 대체로 12세기 전반이며 고려청자의 세련을 지적하고 있다. ”

姜敬淑 著, 『韓國陶磁史』,「高麗時代 陶磁」(서울 : 一志社, 1989). 224쪽.
“12세기 전반, 12세기는 청자의 황금기이다. 1170년 정중부의 무신정변이 일어났지만 인종, 의종, 명종 연간은 무신귀족문화의 절정기이며 고려청자가 이러한 문화를 대변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12세기는 연대 추정이 가능한 청자 자료들과 문헌 기록들이 있어 백자의 편년 설정이 어느 정도 가능한 시기이다. 예컨대 인종 장릉의 순청자와 문공유 (文公裕) 무덤 출토 상감청자 서긍(徐兢)의 『高麗圖經』그리고 고려사 등의 유물과 기록 이다.”

尹龍二 著, 「高麗時代 陶瓷」,『韓國陶瓷史 硏究』(서울: 문예출판사, 1993), 119쪽.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점은 종래 『高麗圖經』의 기록을 너무 확대하거나 비약시켜 대부분의 形象靑瓷, 透刻靑瓷, 陰·陽刻靑瓷 등의 제작시기를 12세기 전반으로 比定하고 있는 점이다. 이들 도자의 기형과 문양, 釉色 등을 비교해 보면 실제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尹龍二 著, 「高麗靑瓷와 佛敎」,『韓國陶瓷史 硏究』(서울: 문예출판사, 1993), 230쪽.
“근년이래로 만든 솜씨가 정교해지고 그 빛깔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釉色은 越州 古秘色이나 기형 등은 汝州新窯器를 닮고 있으며, 그릇의 형태는 일반 정해진 그릇과 같으나 酒尊과 香爐만이 특이하다고 하고 있다.”

尹龍二 著,「北韓의 陶瓷」,『韓國陶瓷史 硏究』(서울 문예출판사, 1993), 483쪽.
“1123년 가까운 시기에 제작기술이 뛰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

金載悅 著, 『高麗白磁의 硏究』(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문학석사 학위논문, 1987), 72쪽.
“대체로 10世紀前半에는 高麗白磁가 發生했으리라고 믿어진다.”

金載悅 著, 『高麗白磁의 硏究』(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문학석사 학위논문, 1987), 73쪽.
“도자기 편년의 기본 자료는 문헌 기록과 유적 출토 례, 기년명이 있는 유존 례 및 요지조사가 주축일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백자는 물론 청자에 관해서도 문헌자료는 신통할 정도로 보이지 않고 있으며, 또 아직 고려 고분 발굴조사가 미미한 상태여서 기년명이 있는 출토례는 6-7례에 불과하고 확실한 추정 년대 유존 례도 극소수인 점 등 고려자기의 편년자료는 매우 드문 형편이다. 백자의 경우에는 문헌이라고는 徐兢의『高麗圖經』에 “放定器制度”란 一句뿐이고 그것도 백자에 관한 것인지, 청자에 관한 것인지도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12세기 초 柳川里 白磁의 경우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현재까지 기년명이 있는 유적 출토 례는
<기년명 유품>
金載悅 著 『高麗白磁의 硏究』(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문학석사 학위논문, 1987) 74-76쪽
1) “淳化四年太廟第一室亨器匠崔吉會造” 993년에 도공 최길회가 만든 것....”
2) 承安 3年銘 宋子淸墓 出土 白磁淨甁 경기도 개풍군 영북면 궁녀동 고분에서 토기매병, 청자완과 함께 출토된 것으로 확실한 기년명을 가진 례이다. 정병의 기형으로 보면 12세기 것이 분명하데 세부 설명을 보면 조잡하고 淡靑灰白色을 띄고 유약과 함께 태토는 유천리12호 요지 출토 것보다 세련대지 못하다....“
<기년명이 확실한 유품이 있으면 추정 년대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인데 12세기로 추정된 유품과 다르다는 것은 추정에 잘못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3) “洪武24年 銘 金剛山 出土 白磁 一括, 1932년 江原道 淮楊郡 長淵面 金剛山 月出峰에서, 석함 속에서 은제 사리탑등과 함께 백자완 및 발 4점, 백자 향로 1점, 발건 되었다. 이중 2점의 박자 발에 조선태조 이성계가 건국 바로 전년 (1391)에 불전에 올리는 발원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大明洪武24年 辛未4月 日 立願”으로 시작되며, 內面에 銘이 있는 鉢의 外面下部에는 “辛未4月 日 防山沙器匠 沈龍(意?)라는 명이 있다. ”

이상에서 연구사를 보았으니 다음은 유품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한다. 유품으로 제시된 고려 백자는 993년, 10세기, 11세기. 12세기 전반, 12세기후반으로, 기년명이 확실한 유품과 시대를 추정 한 유품들이 등재된 도록은 다음과 같다.

崔淳雨 編輯, 『高麗陶磁』,韓國美術全集, (9) (서울: 동화출판사,
1973),123쪽. 圖 129, 白磁梅甁, 12세기 (이 밖에 圖125∼130까지 시기는 11세기 후반, 12세기 전기, 12세기 중엽의 유품6점 수록되어 있다.)

崔淳雨 編輯, 『靑磁』「,韓國의 美」 ⑷ (서울: 중앙일보사,1981)
187쪽. 圖194.白磁, 淳化4年銘항아리, 993년,(이 밖에 圖188∼200까지, 제조 시기는 10세기에서 11세기 후반, 12세기, 12세기 전반, 12세기 중엽 등으로 10점이 수록되어 있다.)

『世界陶磁全集』18 「高麗」(東京: 小學館,1978), 104쪽, 圖 97
白磁碗 11세기 전반 (이 밖에 圖 98∼107까지 12세기 초에서 중반까지 8점이 수록되었다.) 이 밖에도 고려백자를 수록한 도록은 많이 있을 것이나 밝힌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증 되었을 것이니 여타의 도록은 생략 한다.

이상으로 고려백자에 대한 문헌과 연구 성과와 도록에 등제된 실물들을 살펴보았다. 野守 健은 고려 백자는 희귀하다고 하였으며 기년명이 확실한 자료를 제시하면서 고려 초기와 말기의 백자 자료는 밝혔으나 고려 중기의 자료는 밝혀진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高麗圖經」에는 象嵌靑磁와 함께 백자에 대하여는 일언의 언급이 없다고 하였다.

한국학자들의 연구라고 하면 淳化4年銘 백자의 발굴이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다. 鄭良謨는「高麗圖經」을 참고서적에 수록은 하였으나 언급은 없다. 姜敬淑과 尹龍二는『高麗圖經』의 번역에 의의 없이 이 사료에 청자 유품의 시대를 조합하고 있을 뿐이다. 金載悅은 徐兢의『高麗圖經』에 “放定器制度”란 一句뿐이고 그것도 백자에 관한 것인지, 청자에 관한 것인지도 확실치 않으나, 라고 하였을 뿐 이를 분석하여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결과가 이러니『高麗陶經』당시(1123)에도 청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백자도 있었다는 결론이다. 그러면 사료인『高麗陶經』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徐兢이 쓴 원문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둘 중의 하 나이다.
원문의 문제라고는 보이지 않으니 번역을 살펴보자. 번역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한문에 능통한 만금 도자사에도 일가견을 가진 분인 듯하다. 그렇지 않고는 각주,(10∼15)를 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도자사 전공자의 조언을 받아서 각주를 단 것이라면 조언자가 그릇된 정보를 제공한 것 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각주에 대하여 필자의 생각은
주) 10 정기제도(定器制度): 중국의 일정한 형태의 기물을 만드는 법칙을 말한 것이다.”(이상이 기존의 설명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의 생각은 )
“定器制度란: 定窯의 器物制度를 요약하여 定器制度라 하고 중국 도자기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니 방(放)자를 붙어 放定器制度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주를 달았다면 定窯는 宋의 관요이고 백자를 생산하던 요이니『高麗陶經』당시(1123)에는 백자도 있었던 것이 되고 오역의 문제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해석을 분석하면, 중국은 광활한 국토에 요장의 수도 많고, 관요와 민요가 있으니 중국 전체에 통용되는 법칙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각 요장별로 어떤 법칙은 있었을 것이다.

주)14, 신요기(新窯器): 새로 개발된 도요에서 구워낸 기물이라는 뜻. 당시 중국에서도 고려자기와 비슷한 빛깔의 자기를 개발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던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주를 달리 해석하면, 신요기(新窯器)는 汝窯靑磁를 이르는 말이다. 월주요는 唐代부터있었던 요이나 汝窯는11世紀에 시작된 신요이다. 이 요의 산품을 당시는 신요기라고 하였다.
<이에 관한 자료: 長谷部樂爾著,「宋の官窯靑磁」,『世界陶磁全集』12卷「宋」(東京: 小學館, 1977), 223, 229쪽.>
중국 청자는 우리보다 수백 년 앞선 기술인데 이때 고려와 비슷한 청자를 개발했다는 말은 도자사를 전공하는 쪽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주)15 대체로 유사하다: 산예출향 같은 고려자기는 당시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특이한 것이었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순수 고려인의 독창적 창작품이다. 라고 해설되어야 한다. )

오역의 원인은 放定器制度의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기존 번역의 주에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말을 조작한 것이 원인이다. 放定器制度라고 쓴 본뜻은 定窯의 器物制度를 줄여서 定器制度라하고 모방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放[倣자와 같은 뜻]자를 붙어서 放定器制度라고 썼을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면 원문 해석에도 무리가 없고, 관련 자료와 이치로 따져도 어긋남이 없다고 생각 한다. 필자의 추론이 수용된다면 定窯는 송나라의 관요이고 백자를 생산하던 요였으니 徐兢이 설명을 생략한 주발·접시·술잔·사발·꽃병·탕잔 등은 청자가 아니고 백자인 것이다.
고려백자는 세계가 인정하는 사실인데 이것을 없었다고 하면 번역이 잘못 된 것이지 徐兢이 원문을 잘못 썼다고는 볼 수는 없다. 이는 중국 도자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던 탓일 것이다. 번역자도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니 전공분야에서 연구 과정에 생긴 모순점을 하나하나 수정하는 절차를 거치서 역사서가 바르게 정립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高麗陶經』의 국역을 담당한 부서는 모르겠으나 국사 편찬위원회에서는 이를 바로 잡아 두어야 우리 도자사가 바른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