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지정 중요 문화재 도록
6. 청자 탑
高37㎝,基壇은 長方形이다. 長方11,7㎝~12㎝, 短方10,8㎝~11㎝, 지붕 6,2
연구 목차
서론
1. 사리(舍利) 신앙과 불탑
1) 사리 신앙과 불탑의 시원
2) 불교의 전래와 사리탑
3) 우리나라 사리탑의 실체와 사리 관
2. 유품감상
1) 유품의 현황
2) 시대성
(1) 문헌 고찰
(2) 유품 고찰
3) 예술성
4) 희귀성
서론
문화유산은 민족마다 형태와 의미가 다를 것이다. 이유는 나라마다 풍토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종의 여하를 막론하고 그 풍토의 산물로 생명을 보존하고 그를 이용하여 만든 물산들이 문화재이다. 그 문화재에는 종교적 믿음이 용해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가 다르다.
우리의 풍토는 지구의 북반구에 위치하여 사계절이 분명할 뿐이 아니고, 질긴 성질의 소나무가 있는가하면 곧게 자라는 전나무도 있고, 땅에는 적토와 백토의 찰진 흙이 곳곳에 묻혀있는 금수강산이다. 그런대도 우리나라에는 나무로 만든 목탑은 희귀하고. 일본에는 목탑이 많다. 그 이유는 기후의 탓이다. 일본의 기후는 습도가 높아서 목조로 탑을 지어도 말라 틀어지지 않으니 목조탑이 많으나, 우리나라 기후는 건조(乾燥)해서 목조탑은 틀어지니 목조보다 석조를 많이 만들었던 것이다.
중국은 나무. 흙, 돌을 다 갖추고 있으나 그 중에 특히 찰지고 가소성(可塑性)이 높은 흙이 많고 기후가 건조하기 때문에 도자기도 발전 하였지만 흙 문화의 유적과 유물이 많다. 노천에 축조된 만리장성도 흙으로 빚은 벽돌을 많이 사용하였고, 진시 황릉에서 발굴된 토용들도 흙으로 만든 유품들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불교를 믿어왔으니 불교와 관련된 문화유산이 많다. 따라서 본 청자 탑도 불교와 관련 있는 유품으로 추정되기는 하나 불교 장식이 없는 탑이다.
동양 삼국은 불교 문화권에 속했으니 탑의 형태는 비슷한 구조로 유존되고 있다. 그러나 도자기로 탑을 만든 예는 흔하지 않다. 동양 삼국의 도자기 도록에서는 찾지를 못 하였다. 필자는 처음 보는 유품이다. 따라서 우리 도자사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의미에서 본 유품에 대하여 근거 사료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사리(舍利) 신앙과 불탑(佛塔)
1) 사리 신앙과 불탑의 시원
사리 신앙과 불탑의 시원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사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불교의 교조(敎祖)인 석가모니가 입적하자 당시 인도의 葬法 에 따라 茶昆(火葬)을 하였다. 그 유골을 인도의 여덟 나라의 제자들이 각기 자기네가 모시기를 주장하였다. 그 해결책으로 신골(眞身舍利)을 꼭 같이 8등분하여 병에 넣어서 각기 자기 나라로 가지고 돌아가서 모셨는데, 병을 예배의 대상으로 하기에는 불손하여 병을 안치할 구조물을 만들어 그 속에 장치(藏置)하였다. 그 구조물이 탑[塔婆]인 것이다. 이러게 시작된 것이 사리 신앙의 시초요 불탑의 기원이라고 한다.
시작은 이렇게 되었으나 그 내용물에 따라 여러 종류의 사리탑으로 나눠진다. 즉 교조의 신골인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탑을 분사리라고 한다.(敎祖의 身骨을 8등분으로 나누었으니 分舍利라고도 하고, 사리 8分이라고도 한다.) 또 한 종류는 신골을 나눌 때 참여 못하였던 사람들이 茶昆 뒤에 남은 제(灰)를 모아서 이를 탑에 봉안한 경우를 회탄탑(灰炭塔)이라 하고, 불멸(佛滅) 뒤에 이 회탄탑 10기가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또 한 종류는 불교가 외국으로 전파되면서 신골에는 한계가 있으니 불타(佛陀)의 정신인 불경을 법신사리라고 하고 이 불경을 봉안한 탑을 사리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리탑 외에 고승의 신골에서 나온 사리를 승사리(僧舍利)라 하고, 이 승사리는 僧塔이나 浮屠에 납치(納置)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리탑은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즉 부처가 돌아가신지 100년이 지난 B, C 3세기 중엽에 大印帝國을 건설한 마우리아王朝의 아소카王(Asoka)이 불사리를 장치한 여덟 기의 탑 중 7기를 발굴(한 기는 주민들의 반대로 발굴을 못하였다.)하여 불사리를 꺼내어 인도 각 지방에 8마 4천기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
불교의 전파를 위한 이런 노력의 결과로 불교의 교세는 확장되어, 중국을 위시하여 동양 세계로 불교가 전파 되었다. 그 전파 과정에 사리탑 본래의 뜻에도 여러 가지 의미로 변화를 겪게 된다.
2) 불교의 전래와 사리탑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삼국이 조금씩 다르다. 고구려에는 소수림왕 2년(A, D 372)에 秦王 符堅이 僧 順道로 하여금 불경과 불상을 전해온 것이 시초였고, 백재는 이보다 12년 뒤인 枕流王 元年(A, D 384)에 東晋에서 胡僧 達磨難陀가 전하였으며, 신라는 이들 양국보다 약 1세기 반이나 늦은 法興王 15년 (A, D 528)에 불교가 공인 되었다. 하지만 불사리가 들어온 기록은 불교가 가장 늦게 들어온 신라 문헌에 나타난다.『三國史記』권4(眞興王 十年)條에 梁에서 불사리를 전하니 眞興王이 奉迎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十年春梁遣使與人學僧覺德送佛舍利王使百官奉迎興輪寺前路).
인도에서 발생한 사리 신앙이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되는 과정에 사리에 대한 인식도 많이 변모되었다. 그 변모의 실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에서의 불(佛)사리는 교조인 석가모니를 모시는 정성으로 모셨고, 중국에서는 영검이 있다고 하여 모셨으며, 한국에서는 신앙의 대상으로 모셨으니 불상과 함께 예배의 대상으로 변모하였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시기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8백여 년이 지났고 또 멀리 떨어진 한반도에서는 眞身舍利를 구하기 어려우니 불타의 정신이 깃든 불경(法身舍利)을 탑에 봉안한 것이 한국의 사리탑인 것이다. 우리 사리탑에는 불경만 납치(納置)한 것이 아니고 진신 사리는 없지만 사리를 담으려고 만든 빈 병을 함께 납치하였던 사실이 발굴결과 밝혀졌다.
3) 우리나라 사리탑의 실체와 사리 관
한국의 사리탑에는 敎祖의 身骨인 眞身舍利는 있을 수가 없으니 법신사리가 주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헌에는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通度寺 戒壇, 金山寺 金剛戒壇 같은 것을 마련하고 인도의 스투파형 사리를 탑에 납치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사리장치를 학술적으로 조사한 바가 있었다. 이때의 조사 대상은 목탑 3기, 석탑 15기. 전탑 1기로 모두 19를 조사하였다. 이때의 조사표는 『韓國의 美 (9) 石塔』에 실려 있으니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표에서 사리를 담을 용기의 명칭(舍利器. 舍利壺, 舍利盒, 舍利甁, 舍利石壺, 舍利函)은 다양하게 기술되어있다. 그러나 명칭은 달라도 모두 사리를 담을 그릇의 뜻일 것이다. 또 이 그릇들을 만든 자료는 金銅, 우리, 水晶, 眞鍮 등 여러 가지 자료를 쓰고 있다. 이때의 조사 대상 19기 중 2기에는 사리에 대한 기록이 없다. (두 곳 중 한 곳은 도굴당한 곳이다.)
이 표에 사리를 담을 용기(舍利器)는 17개 탑 모두에 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리기의 내용물인 사리가 나온 곳은 한 곳 뿐이다. 즉 奉化 西洞里 東 三層塔에서 「유리제 사리병에 舍利 三粒」이 나왔다는 기록이다. 나머지 16개의 舍利器는 모두 빈 그릇이었다는 말이다.
이 조사표에는 두 가지 의문이 있다. 하나는 奉化 西洞里 東 三層塔에서 나온 사리 「三粒」은 누구의 「사리」인가 하는 문제이다. 인도의 眞身舍利에 대하여는 通度寺와 金山寺의 경우는 戒壇과 金剛戒壇을 마련하고 인도의 스투파형 사리를 탑에 납치하였다. 라는 문헌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奉化 西洞里 東 三層塔의 경우는 아무런 기록이 없으니 누구의 「사리」인가 하는 것이 의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승의 身骨에서 나은 「사리」를 승사리(僧舍利)라는 명칭으로 모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승사리는 사리탑에 내장하는 것이 이니라, 僧塔이나 浮屠에 內藏한다고 하였으니, 이 三粒의 사리는 누구의 사리인지가 분명치 않다.
또 하나의 의문은 奉化 西洞里 東三層塔 외의 16기에는 사리 없이 빈 병(舍利器의 用器)만을 내장하였다는 말이 된다. 이는 종교적으로는 빈병이지만 사리가 들어있는 것으로 이해를 할는지 모르지만 물리적으로는 신자를 속인 행위가 된다.
불교가 들어올 당시부터 법신사리(불경)는 사리병에 들어가지 않으니 빈 병을 내장하는 것이 하나의 형식으로 오랜 전통이 된 듯하다. 그러나 빈 병이라는 사실을 아는 날, 속임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속았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지우거나 생각지 않으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는 불타의 정신이 담긴 경을 법신사리로 탑에 내장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고려 때에 오면 종이[紙}만드는 기술과 인쇄술의 발달로 많은 경은 책으로 편집되었고 또 승려들도 중요한 경은 암송하였을 것이니 불타의 정신인 불경은 많은 불자의 머리에 암기되어 불타의 정신이 체질화되었을 것이니, 불경이 법신사리로서의 권위는 퇴색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불탑을 불상과 함께 예배의 대상으로 모셨으니 굳이 빈 병을 탑 속에 내장할 필요성이 없었다.
기존의 연구서에는 法住寺捌相殿(조선중기)雙峰寺大雄殿(조선중기)을 끝으로 연구를 마감하고 후대에 관한 연구는 없다.
지금 우리의 역사서에는 조선 사회를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사회로 알려져 있다. 불교 사회가 유교 사회로 전화하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이유는 내부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역성혁명을 주도한 신진 세력은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고 친명(親明)의 시대로 정치개혁을 요구하던 세력들이었고 이태조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를 무너트리고 유교를 숭상하는 세력이 나라를 세웠으니 불교는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태조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에 명맥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 사실을 『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정리하면 이태조는 문무백관과 관제를 정하는 登極詔書에 불교를 예조에 소속시키고 국초부터 중신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흥천사를 세우고 사리각을 창건하여 정부가 추진하는 배불 정책에 마찰을 일으키며 국정에 영향을 주었다.
이태조의 불교 신앙은 등극 전과 후를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등극 전에는 개인적인 기원에 불과 하였지만, 왕정치하(王政治下)의 임금이 되고부터는 국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태조의 신앙행적에는 전설과 실증자료가 있다. 전설은 론 외로 하고 실증자료로는「洪武二十四年銘 白磁」유품이다. 이 유물은 도자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씩 보았던 유물이다. 이 유물은 이태조가 등극하기 일 년 전인 1391년에 기원문을 새기고, 그 백자를 만든 장인과 비구의 이름까지 각명하여 금강산 월출봉의 명당에 묻었던 것인데, 이것이 1932년 일인들에 의하여 발굴 되었다. 기원문에 반역의 뜻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반역의 음모가 기원의 내용이었음을 부인하거나 변명 할 수 없는 증거품이다.
혁명을 주도한 친명파 세력들은 불교 국가이던 고려 왕조를 붕괴시키고 유교 사회의 조선 왕조를 세웠으니, 사후 세계를 바라보고 忍耐하고 堪耐하던 국가가 현실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로 전환하였으니 국제적 감각도 현실 지향으로 실익을 추구하여 사대(事大)를 택하였을 것이다. 역성혁명으로 왕권을 탈취하였으니 이론으로 혁명의 당위성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이론의 근거로 고려 중기부터 백색을 기피하던 오행설의 金克木을 적용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색상은 東方木의 청색이었으나 목을 극하고 세운 조선은 金克木의 백색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백의민족이 생겨나고 자기도 청색이던 고려청자가 조선 백자로 전환 되었다.
이렇게 세운 조선이었지만, 불교 신자였던 태조가 왕권을 잡으면서 억불지향의 조정과 왕실간의 마찰은 끝이지 않고 이어진다. 이에 대한 사료를 살펴보면 조선왕조 전 기간에 불사에 관한 기록은 6951건에 달한다. 그 많은 사건 중 대부분이 조정의 반대에 부딪쳤지만 절대 권력의 왕정치하(王政治下)에서 조신들의 반대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왕실의 비호 하에 조선 중기에는 많은 사찰을 창건 하게 된다.
무엇 때문에 왕실에서 불교에 대하여 이렇게 집착하였을까를 살펴보면 태조의 불교 사상을 허물 수 없는 이유는“신하의 가문을 왕실로 승화시킨 태조의 위업을 지키는 것이 후손들의 사명이기도 했지만, 당시 종주국이던 명나라의 영향도 있었음을 인정해야할 사료가 있다.“사례감태감(司禮監太監) 황엄 등을 보내어 그대 나라와 탐라(耽羅)에 가서 동불상(銅佛像) 몇 좌(座)를 구하게 하니, 잘 도와 성사시켜 짐(朕)의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태종 6년(1406) 4월 19일 : 세종 1년 8월 22일)
명의 사신이 칙서와 자문을 가지고 왔으니 조선의 정책은 조정의 뜻대로 운행할 수가 없었던듯하다.
參考文獻 韓國精神文化硏究院 百科辭典. 브리태니커百科辭典, 弘法院 佛敎學大辭典, 국사 대사전, 韓國의 美 (10) 韓國佛敎美術, 韓國의 美 (9) 石塔, 韓國의 美 (24) 木漆工藝. 韓國의 美 (7) 高麗佛畵. 韓國의 美 (16) 朝鮮佛畵, 韓國美術全集 (5) 佛像, 韓國美術全集 (6) 石塔. 古陶磁の科學. 陶磁器 釉藥. 工藝用 陶磁器.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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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품의 현황
「도 1」 「도 2」
측면도 고대부분은 약간 잔방형
본 유품은 청자 오층 탑이다. 형식은 목조 구조로 옥신(屋身)에 우주(隅柱)를 세우고 층마다 마루를 깔았다.
지붕은 암 수 기와로 덮었고 추녀는 활처럼 휘어져 곡선을 이루고 있다.
상륜(相輪)부에는 불교적 장식 없이 팔작지붕으로 마무리 하였다.
탑신 부는 1층에서 오층까지의 높이를 점차적으로 낮게 조성되어 안정감 있게 설계되었으며 方形의 基壇과 隅柱는 直線이고 기와와 추녀는 曲線이다.
산화의 기포가 기와의 골에 몰려 유약 밑으로 비친다. 고대는 평저(平底)이고 모래 받침이다. 고대의 일부에는 유약이 산화되어 태토가 들어나 보인다.
태토는 곱게 정선 된 자토이다. 탑이 놀지 않도록 고정 시키려 했는지 바닥에 흰 가루로 덧칠을 했다.
유약은 두껍게 시유되었으며 빙렬은 없다.
2). 時代性
본 탑은 선례가 없는 초탐(初探)의 유품이다. 그러니 시대 추정을 문헌과 유품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문헌 고찰
본 탑을 언재 만든 것일까? 그 제작시기를 찾고자 문헌을 탐색하였으나 청자로 탑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언재 왜 만들었으며, 무슨 연유로 불교 장식이 없는 탑을 만들었을까? 그 필연성을 찾고자『朝鮮王朝實錄』을 검색하니, 世宗 15년(1433) 7월 12일 조에 단서가 될 만한 자료가 있다. 즉
“근정전 취두(鷲頭)가 비로 인해서 무너졌으니 마땅히 고쳐 덮게 하여야겠는데, 청기와[靑瓦]를 구워 만들자면 그 비용이 매우 많으므로 아련와(牙鍊瓦)를 구워서 덮을까 한다. 그런데 본국 사람은 범사에 빨리 하고자 하여 정밀하게 하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정밀하고 좋게 구워서 비가 새어 무너질 염려가 없게 하겠는가.”
하니, 安崇善과 金宗瑞가 아뢰기를,
“청기와를 구워 만드는 것이 상책이 되겠사오니, 그 어렵고 쉬움을 시험해 본 연후에 정하기로 할 것이오며, 만약 아련와를 정밀하게 구워 만들려면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더 정해서 책임지고 만들게 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하니, 그대로 좇아 즉시 병조 판서 최사강(崔士康)과 공조 판서 조계생(趙啓生)에게 명하여 별요(別窯)와 동서요(東西窯)의 제조를 삼고, 판군기감사 이견기(李堅基)·선공 정 서인도(徐仁道)·전 소윤 이호(李護)·좌랑 하효명(河孝明)로 별좌를 삼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에 靑瓦의 어렵고 쉬움을 실험해 보자는 기록이 있다. 문헌상으로는 高麗 毅宗 2년(1148)에 養怡亭을 청기와로 덮은 되에는 청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니 그 공백 기간이 285년이다. 오랜 세월 청와를 만들지 않았으니 기술을 상실하였다는 의미도 있다. (세종 15년 이 시기에 陶磁器窯는 관요가 설치되기 전이었고 수도를 漢陽으로 천도한 후 장안의 화재를 줄이기 위하여 기와로 지붕을 덥고자 蓋瓦窯인 別瓦窯와 東西瓦窯는 官窯로 운영하고 있었다.)
위의 사료에서 安崇善과 金宗瑞는 靑瓦를 시험해 보자는 제의를 하였으나 세종은 그들의 제의에 개의치 않고 아련와(牙鍊瓦)를 구워 勤政殿 취두(鷲頭)를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한 나라의 정치 일번지인 근정전의 취두를 수리하는데 비용 때문에 청와를 굽지 않고 아련와로 수리하자는 논의는 고려해 보아야할 구절이다.
이 청와의 제작과정을 임금인 세종이 安崇善과 金宗瑞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인 듯하다. 즉 청기와를 굽으려면 청색재를 써야 하는데 청색제로는 酸化銅과 코발트가 있다. (여기에는 다른 첨가물도 따른다.) 산화동은 요변(窯變)이 심하여 바라는 색을 내기가 까다로운 안료이다. 가장 안정된 청색제는 코발트이다. (陶磁器 釉藥
<うわくすり>
宮川愛太郞) 그러나 코발트는 외국(中國)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가격이 비싸기도 하거니와 중국이 청색재(코발트)를 수출 금단 품으로 지정하고 있었으니 쓸 수가 없었다. 밀수입된 청화안료로 근정전을 수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련와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鉛鐵이나 銅鐵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련와를 굽는 유약의 원료인 鉛鐵과 銅鐵은 전국 각지에 생산되고 있었다. 그 산지를 『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된 곳은 (세종 6년 1월 4일 : 세종 6년 6월 29일 : 세종 9년 1월 4일 : 세종 20년 9월 15일 : 세종 21년 8월 28일 : 세종 24년 2월 11일 : 세종 24년 9월 18일 : 지리지에 기록되 산지는 화해도, 황주목 시흥 도호부 : 봉산군, 회양도호부.)
아련와도 상시 굽던 기와가 아니니 시험 번조를 거치고 釉色이 안정된 뒤에, 본 청자 탑을 아련와 유약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다. 이 탑을 아련와 유약으로 보는 이유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고려 청와의 색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니 고려 청와와는 기법과 유약이 다르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안료를 분석하고 과학적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지만, 이 아련와에 대하여는 사료가 분명하고, 당시 청색기와는 고려 靑瓦와 牙鍊瓦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본 탑에 불교 장식을 하지 않은 점도, 고려 시대의 유품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고려 시대에 만든 것이 라면 불교장식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는 배불숭유의 정치사상이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문소전의 불상을 철거하고 그 대용으로 쓰고자 만든 탑이니 불교 장식을 하지 안하였든 것이다. 또 억불정책을 지향하는 조정이었으니 내전에 안치할 탑에 불교 장식을 했다면 조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으나, 불교장식이 없으면 조정에서도 반대할 명분이 없어지고, 불교 장식이 없어도 탑이 예배의 대상임에는 변함이 업으니 불교 장식 없이 만든 것은 세종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신라와 고려 시대에 성기를 누렸지만 조선 시대에는 억불정책에 밀려 그 세가 위축된다. 특히 세종대에 와서 불교는 크게 변화한다. 이에 대한 사료를 살펴보면, 세종1년 8월 30일과 동년 9월7일의 사료에는 태조가 국초에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창건한 興天寺의 舍利閣에 안치하였던 석가모니의 사리 4개와 전국 사찰에 보유하였던 사리를 수집하여 그 중 550개를 선별하여 중국 사신 黃儼에게 주어 중국으로 보낸다. 이는 중국 황제의 요구에 의한 것 이었다. (세종 1년(1419) 8월 22일 : 세종 1년(1419) 9월 2일.)
사리 신앙의 불교는 그 근본이 사리인데 사리를 국외로 반출하였으니 이때 내불당도 혁파되었을 것이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세종 이후 조선의 불교는 사리 신앙의 궤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중국 사신 黃儼이 임금에게 불상에 예를 올리라고 권했으나 태종은 끝내 절을 하지 않았다. (태종 6년7월 18일) 이러니 태종이후 세종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배불숭유 정치를 지향하는 조신들과 궤를 같이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내불당을 혁파한 세종은 문소전(文昭殿)에 설되었던 불상(佛像)과 잡물(雜物)을 거두어 흥천사(興天寺)로 옮기라고 명하여 궐내의 불교유적을 철거하였다. (세종 15년(1433) 1월 30일. )
이 조치에 당장 부딪친 문제는 대비를 비롯한 내명부의 여인들의 불평이었을 것이다. 가족의 질병 치유와 건강, 조상혼의 천도 등은 궐내에서 드리던 불공이었지만 지금부터는 절까지 가야하는 불편이 따랐기 때문이다.
한가한 내명부 여인들의 불공은 수시로 행하던 일상이었는데
절까지 가야한다니, 그들의 불편은 대단 하였을 것이다. 내명부의 나들이 행차는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불상을 철거한 세종이 해결해야할 몫이었다. 오랜 세월 정신적인 지주였던 불교의 혁파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명부의 불편 해소에 고심하던 세종이 아련와를 굽는 기회에 본 탑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론 하는 것이다. 이유는 철거한 불상으로 인하여 야기된 내명부의 불평을 해소하기 위하여 이 탑을 철거한 불상을 대신하고자 함이었다.
탑에 불교 장식을 하지 않은 것도 문소전에 안치할 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불교 장식을 하지 않으면 조신들이 반대할 명분을 주지 않고, 불교 장식이 없어도 불공드리는 데는 지장이 없고, 내명부의 불편도 해소할 수 있었으니, 본 탑은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세종이 고심 끝에 얻은 발상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내불당을 혁파하고, 불상을 철거하고, 舍利를 국외로 반출한 세종이었으나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세종 30년(1448) 7월 21일에는 뜻밖의 조서를 반포하였다. 그것은 문소전 뒤편에 내불당을 창건한다는 조서이다. 이 발표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반대 상소와 간언이 집요하였으나, 세종은 평소와 달랐다. 상소는 돌려보내고 간언은 윤허하지 않고, 불사를 강행하였다. 평소의 세종은 매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조신들의 의견을 존중하던 임금이었지만 이번만은 조신들의 간언을 들어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불사를 추진한다. 뿐만이 아니라 조정의 간언에 대하여 세종의 비답은 강경하였다.
“국가의 물건이 곧 인군의 물건이니 북으로 5진(鎭)으로부터 남으로 제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임금이 임의로 쓸 수 있는 것이니, 공사(公私)를 따지지 않고 써도 가하다.”라고 하였다.(세종 30년 7월 21일) 내불당의 창건은 세종 본인의 의지가 아니고 종주국이던 중국의 요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朝鮮王朝實錄』에 그런 구절은 없다.)
(2) 유품 고찰
문헌으로는 세종 15년(1433)에 만들었다고 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그러나 이를 유품으로 입증하기는 어렵다. 이 문재 해결의 관건은 이 유품이 아련와 유약이라는 확증이다. 이 탑의 유약이 아련와와 같은 유약임을 열거하면
1. 본 유품에 사용된 청색 안료가 고려 청와에 사용된 안료와 다르기에 유품의 색상이 확연히 다르다.
2. 탑에 불화 장식을 하지 않은 것은 문소전의 불상을 철거한 자리에 대체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고려 시대의 것이라면 불교 장식을 안 할 이유가 없다.)
3. 아련와는 국내산 鉛鐵이나 銅鐵로 만들었다. 이 자료들은 국내에서 채굴되는 원료들이다.
4. 鉛鐵이나 銅鐵은 화도가 약하기 때문에 탑이 경질의 磁器質이 못되고 軟質의 陶器質이다.
세종 15년에 근정전의 수리를 위하여 아련와를 만들었다는 사료가 확실하고 본 유품을 육안으로 보아도 청화와 구별할 수가 있다. 또 우리의 청색은 기와는 靑瓦와 牙鍊瓦가 있을 뿐이다.
두 유품을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는 점을 예시하면 첫째, 高麗 靑瓦의 유약보다 본 유품의 유약이 두껍게 시유되었다. 둘째 색상이다 고려 靑瓦는 淡靑色인데 비하여 牙鍊瓦는 深靑黑色 深靑綠色 綠黃色 등 다양한 유품이 있다. 셋째 산화 기포가 크게 보이는 점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차이점이다. 그러나 기포가 크게 보이는 것은 유약이 두껍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존의 연구에 아련와에 관 한 연구가 없으니 고려 청와로 분류된 유품을 비교 유품으로 제시한다.
도 3 도 4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제시된 자료들은 고려 靑瓦로 분류된 유품들이다. 이 9점을 대비(對比)유품으로 제시하고 비교하기로 한다.「도3」의 靑瓦 자료는『世界陶磁全集』18卷에 실린 (國立中央博物館所藏) 고려 청와 유품이고,「도4,5,6.7,8」은 東亞大學校博物館의 所藏品이다. 이 모두가 고려 靑瓦로 분류된 유품들이다.
「도5」 「 도 6」
총장 39,5㎝, 미구 4㎝ 총장 31,3㎝, 미구2,25㎝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위의「도5」와「도6」은 고려 靑瓦와는 다르나 아련와에 관하 연구가 없으니 현재는 청와로 분류되어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도 5,6」의 유품 두 점을 아련와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도5」의 색상은 深靑黑色이고「도6」은「도 5」보다는 녹색이 다소 비치는 深靑綠色이다.
시대적인 차이에서 오는 색의 변화도 있겠으나 대체로 와장(瓦匠)의 기술력이 자기장(磁器匠)의 기술에 미치지 못하거나 기와는 일상의 애용품이 아니니 다소 정성을 덜 드린 느낌도 있다.
「도7」 도 8」
「도5」의 배면 「도6」의 배면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도7」은「도5」,「도8」은「도6」의 소지(素地)를 보고자 제시하였다. 기와는 복사토를 소지로 쓰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아련와의 소지토는 자토(赭土)임을 알 수가 있다.
아련와는 전국 여러 박물관에 수점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청와로 분류하고 있다. 도자사적으로는 靑瓦와 牙鍊瓦는 따로 분류하여야 할 것이다. 이유는 제작된 시대가 다르고 사용된 원료가 다르고 제작 기법이 다르며 세상의 모든 과학이 세분화 되고 있는 이때에 우리만 세상을 역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예술성
탑을 만든 소재가, 돌이건, 나무이건, 자기이건 간에 탑 본래의 목적은 사람의 소망을 기원하는 예배의 대상이지 감상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논의되는 마당이니 예술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본 탑을 기예(技藝) 면에서 보면 도예의 달인이 아니고는 만들 수 없는 유품이다. 일반 도자기와 같이 문래를 사용하여 만든 것이 아니고, 건물을 짓듯 구도를 설계하고 그 설계에 따라 재료 하나하나를 다듬어 조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 9」 「도10」
본 탑을 만든 도장(陶匠)은 구도(構圖)를 잡고자 여러 절의 탑을 둘러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중 法住寺 捌相殿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며 여러 차례 다녀왔을 것이다. 탑의 층수가 같은 오층이고, 탑신의 구도가 유사하며 기단(基壇)과 우주(隅柱)는 직선으로, 기와와 추녀는 곡선으로 직·곡의 선을 조화롭게 배합하여 안정되고 평화로운 탑으로 완성한 것이 법주사 팔상전이 재건축되기 전의 구조일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오직 직선만으로 조성된 사리탑과는 미감(美感)이 판이하다. 사리탑을 바라보면 직선에서 느껴지는 장엄함이 종교적 권위로 다가와 인간을 압도하지만, 본 탑은 직·곡선이 조화를 이루고, 치우침이 없으니 조화의 미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색상은 자연의 미이고, 조형은 인공의 미이다. 청록색이 봄의 상징이라면 녹황색은 가을의 상징이다. 봄꽃도 아름답지만 가을 단풍도 아름답다. 봄꽃이 희망의 아름다움이라면 가을 단풍은 결실의
아름다움이다,
「도중원 탑평리 7층 석탑 제시 자료
본 탑의 색조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 갈수록 황색이 옅어진다 단풍이 들어가는 가을을 연상하게 한다. 이는 인공이 아니고 불의 조화이고 세월의 변화이니 더욱 아름답다. 특히 추녀 모서리와 취두의 기와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삐쳤다. 이 힘이 탑 전체에 강한 위용을 풍기고 있다.
이 탑은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서, 든든한 형님 같고, 다정한 아내 같아 속마음을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친근감을 주는 유물이 다. 최상의 예술품은 아름다움과 함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안정감일 것이다.
옥개는 암·수 기와를 하나 같이 고르게 다듬고, 추녀가 곡선으로 처졌으나 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쳐지게 만든 것이 아니고 직선으로 만들어 소성 과정에 열기에 의하여 쳐질 것을 감안하고 만들었을 것이니 도예 기술이 경지에 달한 도공이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 아닐 수 없다. 숙련공이 임금의 명을 받아 정성을 다한 작품일 것이고 왕실의 소망이 탑의 층층에 싸인 유품이다. 탑신 전체로 보면 일층에서 오층까지의 추녀가 육곡의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인공과 불의 조화가 이뤄낸 수(秀)작품이다.
세종이 공조판서 조개생(趙啓生)을 提調로 입명한 것은 능숙한 도공은 차출하려는 복안이 있었던 듯하다.
3. 희귀성
우리 문화재에는 불교와 관련된 유품이 많다. 사원용(寺院用)의 대형 불상에는 鍍金 불상, 金銅 불상, 鐵材 불상, 木材 불상 등 다양하고, 개인용으로는 소형의 불상이 있는데, 그 종류도 다양하다. 즉 鍍金, 金銅. 純金 木佛 등이 있다. 그러나 소형 탑인 경우는 본 유품이 유일하다. 사찰에 대형 사리탑이 있을 뿐 소형의 탑은 본 유품과 같이 특별한 조건이 아니고는 만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 시대는 궁궐 안에 절이나 탑이 있었을 것이니 도자기로 소형 탑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런 관계로 현존하는 유물이 희귀하고 밝혀진 것으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세상의 흐름에 따라 문화는 변하는 것이 인류사의 원칙이지만 불교문화는 敎義와 敎論을 지켜왔기 때문에 변하지 않았거나 변하여도 그 속도가 매우 늦은 것이 사실이다.
본 탑에 불화 장식이 없는 것은 불교를 비판하는 조신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불교문화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본 탑이 완성되던 날 세종은 지체 없이 왕후에게 전달하였을 것이다. 대비의 기일 전에 절에 다녀와야 한다는 왕후였기 때문이다. 세종은 탑을 흑단나무 상자에 소중히 봉안하여 내시에 들리고 내전으로 갔을 것이다. 임금의 방문을 통고 받은 내전에는 세자 내외도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시녀가 왕의 내방을 알리자 왕후와 세자 내외는 문 밖에서 임금을 맞이한다. 세종이 내시에게 손짓으로 들이라고 하자, 내시는 조심스레 왕비 앞에 상자를 내려놓고 보자기를 끄르고 뚜껑을 열고 탑을 꺼내 왕비 앞에 내려놓는다. 그러자 세종이
“산사에 가시는 행차의 수고를 덜어 드리려고 탑을 만들었습니다.” 라고 하자 왕비는 탑을 어루만지며
“고맙습니다. 금상 깨서 이렇게 배려해주시니 백고난망입니다. .” 하면서 다시 탑을 쓰다듬으며,
“정성드려 만들었어요. 이렇게 공들여 만드는 걸음에 불화를 그렸으면 더욱 좋았을 걸요.” 하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러자 세종이
“어떤 장식이 좋겠느냐고 묻기에 짐이 장식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왕비는 의아한 표정으로
“왜요” 하고 반문하자, 세종은 스님이 법문 하듯, 거침없이 불교 문양을 그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부처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 불상을 그리지 않으면 기도할 때마다 다른 부처를 모실 수가 있을 것 같아서요, 즉 영생을 기도할 때는 아미타불을 그리고 건강을 기도할 때는 약사여래를 그릴 수가 있을 것 같아서요.”
중신들의 반대를 모르지 않는 왕후는 금상의 재치 있는 답변에
미소를 지으며 금상과 눈을 맞추고, 허허 하하고 크게 웃었다. 세자 내외는 영문을 모르는 채 따라 웃는다.
본 탑은 선례가 없는 초탐(初探)의 유품이니 우리 도자사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하는 과제이기에 많은 비판과 질책을 기대하면서 미숙한 글을 제시한다. 이 연구를 심화시키려면 아련와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탑이 몇 개가 더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지금 은 발견된 것이 이것뿐이지만 장차 더 발견될 가능성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왕후와 세자 비는 언재 만나도 존경하는 시어머니와 사랑스러운 며느리 사이지만, 후궁들은 정비(正妃) 앞에 나서기가 조심스러우니 세종을 졸라 나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靑瓦와 본 유품의 유약이 다른 것은 누가 봐도 확실하지만 유약을 분석하여 사용안료가 鉛鐵인지 銅鐵인지 또는 무슨 성분의 광물질이 더 첨가되었는지 분석 결과를 기대 하면서 붓을 놓는다.
2011,11,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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