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지정 중요 문화재 도록
9. 백자투각필통(白磁透刻筆筒)
높이(高) 14.7㎝ / 입지름(口俓) 12.7㎝ / 밑지름(底俓) 11.1㎝
연구 목차
서론
1. 국가의 제도(制度)와 공산품
1) 고려 시대의 도자기
2) 조선 시대의 도자기
3) 일제 강점기 연구와 오늘의 실상
2. 유품감상
1) 현황
2) 시대성
3) 예술성
4) 희귀성
서론
1. 국가의 제도(制度)와 공산품
세계화가 된 지금의 사회는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고 인간 본연의 창의성을 발휘하여 개발한 제품을 국제 시장에 수출하여 개인은 돈을 벌고, 국가 경제에 이바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군주국가(君主國家)였던 조선 시대는 국가에서 지정한 규격과 양식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특히 조선 시대의 도자기는 국영(國營)으로 司饔院에서 관장하였고, 그 외의 공산품들도 신분 별로 국가에서 지정한 규격이 있었다. 예를 들면 관복의 장식 문양인 흉배(胸背)에도 문·무관이 다르고, 같은 문관이라도 당상관과 당하관이 달랐으며, 문밖에 드리우는 발에도 용 문양은 왕실 전용이었고, 칠기에도 朱漆(붉은 색)은 일반 백성은 쓸 수가 없었다. 심지어 갓 끈에도 신분에 따라 사용 재료에 구분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再論하는 것은 도자사를 연구하는 일부학자는『朝鮮王朝實錄』에 명문화된 임금의 금령을 지켜지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일인 연구자들 山田萬吉郞와 浜口良光가 『朝鮮王朝實錄』애 왕명의 금령이 있기는 하나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애매한 어조로 왕명 무시의 씨를 뿌렸다. 조국 광복 후 국내 연구자인 鄭良謨와 韓永寓는 한 술 더 떠서 왕명은 지켜지지 않았다. 라고 단정함으로써 도자사 연구 전반에 왕명이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확산되었다.
우리 도자사에는 이와 같이 당치도 않는 근거 없는 주장으로 인하여 조선 시대를 무법천지로 마들었고 그런 사고로 도자사를 연구하고 유품을 감정하는 것이 현행 도자사의 실정이다.
1) 고려 시대의 도자기
고려 시대의 도자기에 관한 사료 중 재도에 관한 사료를 보면“司饔 每歲遣人於諸道 監造內用瓷器...”(司饔에서는 每年 사람을 諸道에 보내어 宮中에서 使用하는 磁器의 製造를 監督하여...)라고 되어있으니 정부가 지정한 형태의 그릇을 공납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高麗史』卷118 列傳 卷第31 「趙浚」 (東亞大學校古典硏究室 1987), 35쪽).
위의 사료는 고려 공민왕 때의 기록이니 고려 사회는 후기에 와서 문란해졌음도 함께 보여 주는 사료이다. 이에 대한 반증으로 고려 후기의 유물에‘內用’명이 각명된 유품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전기의 유품인 매병 등에‘內用’명의 각명이 있다는 말은 듣지를 못했다. 이러한 고려 말기의 실상이 조선조의 도자기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견할 수 있으니 살펴보기로 한다.
2) 조선 시대의 도자기
조선왕조는 고려왕조를 계승한 왕조가 아니고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타도하고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도자기도 고려청자의 전통을 계승치 않고 백색자기(분청사기)로 전환하였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고려청자가 조선백자로 변환된 사실을 정치적 이념의 변화로 보지 않고, 시대의 흐름으로 보았다. 즉 세계의 도자기가 청자에서 백자로 바뀌는 시기에 맞춰 전화되었다. 혹은 고려는 불교 국가였으니 청색을 숭상하여 청자를 만들었으나 유교국가인 조선에 와서는 백자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살펴보면 조선의 도자기가 세계의 조류에 맞춰 변해야 할 이유가 없었고, 불교는 왜 청색을 숭상했으며, 유교는 왜 백색이여야 하는지 근거가 없다.
고려청자가 조선백자로 바뀐 사실을 도자사적 측면에서 보면 분수령과 같은 중요한 변환이다. 그러니 이 문제는 조선 백자 연구의 뿌리가 되는 문제이니 확실히 밝혀 두어야 한다.
이 변화를 상고하기 위하여 '원료'와 '기술' 두 측면에서 고찰하기로 한다. 첫째 원료 면에서 보면, 청자는 흙이 주원료로 이고, 백자는 돌이 주원료이다.
청자의 원료인 점토는 지표면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원료이지만, 백자의 백토는 광물질의 일종으로 그 맥을 따라 채굴하는 것이니 희귀하기도 하지만 채굴에는 많은 비용과 인력이 소요되는 원료이다.
둘째,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청자는 전대(고려)까지 사용하던 기술이니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백자는 새로운 연구와 개발이 따라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원료 면이나 기술적 측면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청자를 계승하는 쪽이 유리한 조건이다. 그런데도 조선 왕조는 청자를 계승치 않고 백자로 전환하였다.
경제적으로 불리한 선택을 한 것은 혁명 정부의 정치 사상적 이론에 따랐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정치사상이던 음양오행설에 따라 金克木의 이론으로 조선왕조의 색상이 백색으로 정해짐에 따라 도자기의 색상도 청색에서 백색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정치 이론에 따라 백색을 선택하였지만 도자기를 생산하는 요장의 사정은 판이하게 달랐다. 요장에는 백토가 없으니 백자를 만들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니 부득이 청자에 백토로 분장을 하여 백색으로 변화시킬 수밖에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요즘 말하는 분청사기인 것이다.
흔한 점토의 청자를 만들면 무난할 것을 청자를 버리고 없는 백토로 백자를 만들라는 조정의 지시를 도공들은 이해를 못 하였을 것이다. 도공들뿐만이 아니고 수요자 계층인 양반들도 분청사기를 선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분청사기는 낫선 그릇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주문이 없었던 이유는 가격이 비싼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격이 비싼 이유는 분청사기는 청자보다 한 공정(工程)이 더 많고(도자기 제작에 공정이 많다는 것은 생산 기간이 오래 걸린다.) 분장용 백토의 소모가 있기 때문이다.
조정의 지시는 청자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분청사기는 주문이 없으니 도공들은 요업을 포기하고 요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정은 예상치도 않았던 도공들의 절박한 생활 문제를 타개하자면 어떤 조치가 있어야 했다. 그 결단이 민영의 요업을 국영으로 전환하였을 것으로 보면 무리가 없다.
요업의 국영화를 위한 조치로 전국의 유능한 도공 623명을(경공장 380, 외공장 100 내수사6 옹장 97, 와장 40) 차출하여 동·서 양반의 관직 외에 장인들에게 잡직이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도공들의 생계를 보장하고 공산품의 안정적 공급과 더불어 분청사기를 각 관아에 납품하게 하여 분청사기의 시대를 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사람은 한번 길 드려진 습관을 고치기가 어렵다고 한다. 청자를 만들던 도공들에게 청자에 백토로 분을 칠하여 분청사기를 만들라는 지시는 공작(工作)의 사리에는 맞지 않는 지시였다. 왜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설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성혁명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도자기는 양반들이 붓끝으로 만들어지는 아니니 신분이 미천한 도공들이지만 사리에 맞지 않는 분청사기 보급에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난관을 해결하기 위하여 민영이던 요업을 국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요업을 국영화함으로써 폐단도 있었지만. 이점도 있었을 것이다. 요업의 국영화에 관한 사료를 보면
“改司饔房爲司饔院。 始置祿官”(사옹방(司饔房)을 고쳐서 사옹원(司饔院)이라 하고, 비로소 녹관(祿官)을 두었다(세조 13년(1467) 4월 4일기해조, (『經國大典』의 工典이 완성된 시기를 1469년 이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으나 原案의 完成은 始置祿官한 1467년으로 보아야 한다.)
위의 사료는 세조 13년(1467)에 반포되었으니 조선이 건국되고 72년이 경과된 시점이다. 이때까지는 민요로 운영하던 요업을 관요로 전환하게 된 동기는 도공들의 생계문제 이었으나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세 가지로 집약할 수가 있다.
1. 궁중 소용의 그릇의 질이 향상되었다. 공납으로 충당할 때는 자질이 일정치가 않았다.
2. 사옹원의 관리를 재도(諸道)에 파견한 필요가 없다.
3. 중앙 관아에 분청사기를 공급하여 분청사기의 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개발된 백자를 왕실이 독점하여 군 신간의 기용을 굳혔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왕실에서 백자를 전용 (독점)하였던 사료를 보면
磁器, 自今進上外, 公私處行用, 一禁。 京外匠人, 潛隱燔造, 市裏及朝官、庶人之家, 私相買賣者, 以違制律論
(자기(磁器)는 이제부터 진상(進上)하는 것 외에, 공사처(公私處)에서 널리 행하여 쓰는 것을 일체 금한다. 경외(京外)에 장인(匠人)이 몰래 숨어서 자기를 만들어 저자 안과 조관(朝官)·서인(庶人)의 집에 사사로이 서로 매매하는 자는 위제율(違制律)7537) 로 논한다.”하였다.)
왕실전용 백자에 관한 후속 사료들
'每歲遣司甕院官, 分左右邊, 各率書吏, 從春至秋, 監造而輸納于御.(매년 사옹원관(司饔院官)을 좌우편으로 나누어 각각 서리를 인솔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만드는 것을 감독하여 어부(御府 임금의 물건을 넣어두는 곳)에 보내어 바치다.)( 민족문화추진회, 『대동야승 Ⅰ』238쪽.)
경기도 광주목 토산조에 '每歲司饔院官 率畵員監造 御用之器' (매년 사옹원의 관리가 화원들을 거느리고 임금이 쓸 그릇 만드는 것을 감독하다)(『新增東國輿地勝覽』Ⅱ「京畿」(서울:財團法人 民族文化推進會 1967), 115쪽.
3) 일제 강점기의 연구와 오늘의 실상
일제 강점기 일인들이 우리 도자사의 연구를 시작하면서 많은 일인들이 참여 하였다. 그 중 山田萬吉郞, 浜口良光, 笠井周一郞 등은 우리 도자사 왜곡을 적극 시도 하였으나 완벽한 역사 문헌(『朝鮮王朝實錄』등) 등의 사료는 고칠 수가 없으니 '왕명으로 반포된 금령이 이기는 하나 그 금령이 얼마나 지켜졌는지? 혹은 령이 령으로 끝난 것은 아닌지?' 라는 주장으로 역사 왜곡을 씨를 뿌렸다. (山田萬吉郞 著 「李朝染付の 民間使用に 就で」陶磁 第六卷 第 四號 (東京: 東洋陶磁硏究所, 1934), 18쪽.)(浜口良光 著,『朝鮮の 工藝』 (東京: (株)美術出版社, 1966), 47쪽.)
일제가 근거 없이 뿌려놓은 왕명 무시의 논조를 광복 후 당시의 도자사 관계자인 鄭良謨· 韓永愚는 한술 더 떠서 왕명이 지켜지지 않았다. 라고 단정 하였다. 이로 인하여 지금은 왕명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연구되는 것이 도자사의 현실이다. (鄭良謨,『朝鮮 白磁展Ⅰ』「前期」(서울 : 財團法人三星美術文化財團 , 1983) , 55쪽) (韓永愚 著 「朝鮮時代の文化と 陶器」『世界陶磁全集』19卷 李朝, 小學館 東京 (1980) 126쪽)
☆☆☆☆☆☆☆☆☆☆☆☆☆
유품 감상
<형상>
색상은 목화솜 같이 부드러운 백색이다. 기형의 높이는 붓이나 죽간(竹簡)을 꼽기에 알맞고, 입은 약간 타원이다. 기체의 상, 하에 두 줄씩의 선을 둘렀다. 이 선을 경계로 동체에 투각을 하였다. 기체의 하부에는 별도의 받침을 붙이지 않고 동체의 내림벽 그대로 마무리를 하였다. 받침의 밑면에는 고르게 시유되었다. 유약은 분원 백자에 나타나는 귤피유(橘皮釉)의 피질이다. 고운 모래 받침이었으나 산화되고 일부에 흔적이 남아있다. 밑바닥의 일부에 연한 황토색의 산화가 보인다.
<예술성>
모든 예술의 어머니는 그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자기에는 투각 문양이 그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조각은 각을 하기가 어렵고 공이 들기도 하지만 각 그 자체가 3차원 예술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문양이 투각된 도자기는 그 인상부터가 함부로 접할 수 없는 주의가 요구된다. 연약한 몸매의 귀부인과 같아서 잘못 넘어지면 깨질 것 같고 힘을 가하면 부서질 것 같다. 그러니 강보에 쌓인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조심조심 다루어야 한다. 그러니 투각 유품은 그 자체가 스스로 귀족이다. 따라서 감상하는 자세도 경건하고 사색적일 수밖에 없다
이 필통에는 예술성과 역사성이 함께 비친다. 필통에 투각을 한 것은 사용자의 신분에 맞도록 격을 높이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그 시대에 흔하지 않은 문양을 조각한 것은 상당한 수준의 그림이 조각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치 않았던 회청 사용의 금령을 만나 채화로 마무리를 못하였으니 이 유품의 시대성은 회청 사용의 금령을 전, 후한 시기의 과도기적 산물이라는 역사적 특성을 지닌 유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에서는 색회자기를 생산하여 국제시장에 유통시켜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거두고 있었지만 우리는 가난을 극복하고자 검소를 강조한 나머지 회청마저 사용치 말라는 금령을 반포한 처지였으니 시대상이 여실한 유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의 사정이 이러하니 이 유품에는 도공들이 이루지 못한 꿈이 한(限)으로 서려 투각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듯하고, 백성들의 아우성이 한 울림이 되어 울려 펴지는 듯도 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양반의 체통을 잃지 않으려고 비단 가난이란 이름 아래 허기에 시달리면서도 꼿꼿이 살았던 청백리(淸白吏)의 창백한 얼굴들이 백자에 반사되어 어른거린다.
이 필통의 뚫새김 구멍으로는 안팎의 공기가 소통되고 있다. 즉 안쪽에 갇혀 유동성 없는 공기의 보수성과 쉼없이 유동하는 바깥쪽의 진취적인 공기를 교류시키는 환경적 조화에 철학적 의미가 또 다른 사고의 문을 열어준다.
이 유품에는 주 문양을 투각하고 청화로 마무리를 못했으니 문양은 난해한 그림이 되었다. 그러나 백자의 색상은 우리 눈에 익숙한 분원 백자처럼 옥색이 가미된 옥백색이 아니고, 목화솜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순백색이다. 순백자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변화를 가감없이 수용하는데 있다. 맑은 날 청명하고 밝은 색이든, 비가 올 듯 어둡고 우중충한 회색이라 할지라도 거부하는 일이 없이 모든 색을 포용하는 너그러움이 있다.
<희귀성>
도록에 보이는 유품 중 1754년‘회청 사용의 금령’이전의 유품에 백자 투각 필통은 보이지 않는다. 투각된 백자 유품으로는 오직「백자청화투조목단당초문호」(도3 참조)가 한 점 있을 뿐이다. 이 유품은 회청 사용 금령 이전의 유품이니 투각 후 청화안료로 문양의 섬세한 부분을 채화하였다. 도판 해설에 따르면 조선조 특유의 기형으로 특수한 유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시 자료는 투각을 하고 난 뒤에 회청 사용의 금령을 만나 청화안료로 세밀한 부분을 그리지 못하였다. 그러니 문양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문양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 도자사에 회청사용 금령(영조 30년)과 맞물려서 투각을 마치고 채화를 못한 유품은 오직 이 유품 하나뿐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추고하는 연유는 회청 사용 금령 이전의 유품이라면 청화안료로 채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금령 이후의 유품이라면 처음부터 도식화 된 문양을 조각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통의 문양을 투각으로 입체화하여 격조 높은 백자청화투각필통을 만들어 존귀한 분의 서실을 장식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그 시대상이 반영된 유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성>
우리 도자기에 투각 문양의 시원을 살펴보면 삼국 시대의 신라와 가야 토기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도1,2 참조) 토기의 투각 기법은 고려 조선으로 계승되면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는 투각 문양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발전한다. 즉 한 계열의 문양은 윤곽을 투각하고 그 각의 세부상황(꽃술, 葉脈 등)을 청화안료로 그린 유품이고, 다른 계열은 도식화된 문양을 투각하여 청화안료로 채화를 하지 않고도 훌륭한 문양으로 완성시킨 유품이다. 투각 문양이 이렇게 두 갈래로 발전한 원인은 1754년(영조 30)에 반포된‘회청 사용의 금령’이 직접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다.
백자청화가 시작된 이래 근 300년 가까이 써 오던 청화안료를 갑자기 쓰지 말라는 금령이 반포되었으니 도자기를 생산하던 분원에서는 채화 안료에 대하여 일대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이 때부터 청화안료를 사용하지 않고 문양을 완성하는 쪽으로 연구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발전한 문양 중의 하나가 도식화된 투각문양이라고 할 수 있다.(도7,8 참조)
이 유품에 제작 시기가 명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제작 시기를 1754년(영조 30년 7월 17일) 청화안료의 금령이 반포되던 그 무렵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유는 회청 사용의 금령 이전에 착수하여 투각을 마친 시점에 회청 사용의 금령이 반포되어 채화를 못한 과도기의 유품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해한 문양이 된 유품이라고 추고하는 것이다. 이 유품의 피부에는 분원 백자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는 귤피유(橘皮釉)가 시유되었으며 기형이 18세기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회청 금령 이전 시기의 유품이었다면 청화안료로 섬세한 부분에 채화를 했어야하고 금령 이후의 유품이었다면 처음부터 도식화된 문양을 투각하여 채화 없이 문양을 완성한 것이 조선 후기 투각 문양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이 유품을 여기에 등재한 것은 조선시대의 투각 문양이 이 유품을 경계로 문양이 변화하는 계기가 된 자료이기 때문이다. 즉 회청 사용의 금령이 반포된 이후의 유품에 나타난 문양을 살펴보면 채색안료로는 진사채, 철사채 등이 있고, 조각이나 첨화(添畵)로 된 문양으로는 양각, 음각, 도식화된 투각 등이 있다. 이 문양들은 청화안료를 쓰지 않고도 훌륭한 문양으로 발전하고 있다.(도7,8,9,10 참조)
다음의 유품 감상에서는 한국 도자기에 투각 문양이 고대 토기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유품으로 밝히고, 다음은 회청 사용의 금령 전, 후 시기의 유품을 제시하여 변화과정을 비교하고, 회청 사용의 금령 이후에는 회청을 쓰지 않고도 훌륭한 문양을 발전한 유품을 감상하고자 한다.
도1 도 2
『세계도자전집』 17권「한국고대」 도 26
器台(기태) 삼국시대 (신라)
『세계도자전집』 17권「한국고대」 도 48
器台(기태) 삼국시대 (가야)
위의 (도1,2)는 신라와 가야토기이다. 우리 도자기에 투각 문양은 고대의 토기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도 3 도 4
『세계도자전집』 19권「이조」 도 55
白磁靑花透彫牧丹唐草文壺 (18세기 전반) (백자청화투조목단당초문호)
『호암미술관명품도록』 도 104
白磁靑畵蘭草文筆筒 (18세기 초) (백자청화난초문필통)
앞의 백자청화투조목단당초문호(도3)는 1754년(영조 30)에 회청 사용의 금령이 반포되기 이전 18세기 전반에 만든 유품으로 투각 후 청화안료로 채화를 한 유품이다. (도4)는 투각은 아니지만 금령이 반포되기 전인 18세기 초에 만든 유품이다. 따라서 청화안료로 채화된 유품이다.
도 5 도 6
제시자료 백자투각필통
『세계도자전집』 19권「이조」 도 73
白磁鐵彩筒形甁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백자철채통형병)
위의 (도5)는 1754년(영조 30)에 회청 사용의 금령 전에 투각을 마치고 청화로 채화할 즘에 회청 사용의 금령이 반포되어 회청으로 채화를 못한 유품으로 추고한다. (도6)의 유품은 회청 사용의 금령이 반포된 후 청화안료를 쓰지 않고 철사로 채화된 유품이다
도 7 도 8
『세계도자전집』 19권「이조」 도 214
白磁透彫牧連環文筆筒 (18세기 후반) (백자투조목연환문필통)
『세계도자전집』 19권「이조」 도 71
白磁透彫葡萄唐草文筆筒 (19세기) (백자투조포도당초문필통)
위의 (도7,8)유품들은 회청 사용의 금령 후에 만든 유품으로서 도식화 된 문양을 조각하여 청화안료를 쓰지 않고도 훌륭한 문양으로 발전한 유품들이다.
도 9 도 10
『세계도자전집』 19권「이조」 도 221
白磁墨壺(백자묵호) (19세기 전반)
『세계도자전집』 19권「이조」 도 217
白磁陽刻十長生文筆筒 (19세기) (백자양각십장생문필통)
앞의 (도9,10)는 회청 사용의 금령이 반포된 후에 개발된 문양들이라고 추고하는 것이다. 퇴화(堆花) 기법은 고려자기에도 있고, 조선 초기 백자에 양각 문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제시한 자료들은 1754년 회청 사용의 금령이 반포된 후에 재창조된 기법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도자사 연구에는 조선시대에 왕명으로 반포된 금령이 있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는 일본인들의 왜곡된 주장에 따라 역대 임금이 반포한 칙령을 무시되었다. 그런 가운데 영조 30년에 반포된“회청 사용의 금령”도 무시되고 있다. 즉 1754년 이후 1882년까지 128년간, 즉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는 왕명이 지켜졌다고 보면 회청 사용의 금령이 유효하던 기간이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는 이 기간 중에 많은 백자청화가 만들어진 것으로 시대를 추정하고 있다. 유품에 기년명이 각명되어서도 아니고 역사 사료에 방증이 될 만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닌 유품을 왕명으로 반포된 금령을 무시하고 시대를 추정하고 있다. 그러니 이 주장을 뒷받침 해줄 증거는『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사서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조선 백자의 시대추정은 전면적인 재검토가 요구된다.
시대성>
희귀성>
예술성>
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