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지정 중요 문화재 도록
8. 백자청화백발매화문호
(白磁靑畵白拔梅畵文壺)
높이(高) 21㎝입지름(口徑) 9.7㎝밑지름 (底徑)13.5㎝
강희년제
연구 목차
서론
1. 한·중 도자기의 차이점
1) 문양기법
2) 뚜껑 형식
3) 연호 관명의 형식.
4) 국적을 밝히고자 기울인 노력
2. 우리 백자청화의 명칭
1) 전래의 명칭
2) 일제강점기의 개명
3. 유품감상
1) 현황
2) 시대성
3) 예술성
4) 희귀성
서론
지구상에는 수많은 박물관이 있으나 소장 유품들은 남의 나라의 유물로 채워진 경우가 많다. 자기 조상의 전래 품이거나 정당한 거래로 소장한 경우도 있겠지만 무력으로 약탈하였거나 불법으로 소장한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박물관에는 조상님들의 얼이 빛나고 정서와 채취가 서려있는 곳이다.
유구한 역사에 외침도 많았다. 난중에 빼앗긴 유물도 있었겠지만 모르는 사이 남의 나라 유품으로 이적된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록을 뒤지다가 제시 유품을 발견하였다.
제시 유품과 유사한 백자청화가 ‘리-버’부 인 의 기념관(Lady Lever Art Gallery, Port Sunlight, Lverpool)과 미국의 뉴욕에 있는‘매트로포리탄’ 미술관 (Metropolitan Museeum of Art)에도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국적은 중국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유품의 기형과 문양이 우리의 것일 수 있다는 판단으로 살펴보았으나 사진에는 뚜껑이 덥혀있어서 뚜껑 속의 실황을 볼 수 가 없었다. 우리의 것이라면 입은 약간내경 되고, 뚜껑과 본체의 접합 부위에는 유약이 시유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실체를 알고자 ‘매트로포리탄’ 미술관 (Metropolitan Museeum of Art)앞으로 질문의 서한을 발송하였다.
질문에 대한 답신에는 사진까지 동봉하였는데 예상대로 입(口緣部)은 내경이고, 뚜껑과 본체의 접합 부위에는 시유가 없다. 이 유품이 우리의 것임을 밝히자면 한·중 도자기의 다른 점이 분명히 밝혀야 하겠으니 살펴보기로 한다.
1. 한·중 도자기의 차이점
한국과 중국은 문화적 배경인 역사가 다르고 기후와 풍토가 다르고 도자기의 소재인 흙이 다르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제가 우리 민족의 창의성을 비하하고자 중국도자의 모방을 심었다. 그 주장을 해방 당시 비판 없이 계승하여 지금까지 발전 시꼈으니 지금은 한국의 우수한 백자청화가 중국 것으로 분류되는 동기가 된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중 도자기는 엄연히 다르다.
1) 문양 기법
우리 도자기의 문양은 중국 도자기의 문양과는 기법이 다르다.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도자기의 바탕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려청자와 분청사기의 바탕색은 희색 이거나 청색이다. 그러니 유색(有色) 바탕에 문양을 시문하자면 바탕색과는 다른 색으로 문양을 시문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발달한 것이 상감기법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은 宣德 때부터 色繪磁器를 개발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유품에 나타난 역대의 문양을 보면 시대가 다르고 사용한 소재는 달라도 표출된 문양이 주는 이미지는 다르지 않다. (청자에 흑백 상감을 한 경우와 분청사기에 백토 분장을 긁어내고 바탕색으로 문양을 묘출한 것이나 이미지는 다르지 않다.)
2) 뚜껑 형식
지금까지 동양 도자에 관하여는 많은 연구가 있었으나 뚜껑에 관한 연구는 없었다.(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도 모른다)
그릇[器物]의 뚜껑은 외부의 이물질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그 형식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다. 즉 그 하나는 덮개 형식이고, 또 하나는 마개 형식이다. 덮개 형식의 뚜껑은 턱 (덮개가 미끄러지지 못하게 돌출된 부분, 즉 받침처럼 돌기된 부분)이 입(口緣部)의 바깥으로 덮인 경우이고. 마개 형식의 경우는 병마개처럼 뚜껑의 턱이 입 안쪽으로 들어간 경우이다. 이 두 형식 중 덮개의 형식으로 된 것은 한국식이고, 마개의 형식으로 된 것은 중국식이다. (주전자와 같이 특수한 경우 즉 덮개로 만들 수 없는 기형에는 한국 도자기에도 마개의 형식이 있다.(도11,12 참조)
본 제시 유품에 뚜껑은 없다. 있었다면 구연부의 무시유로 보아 덥게 형식이었을 것이다.
예외로 한국 도자기에도 중국식 뚜껑 형식의 유품이 있다. 그 예는 국보 제170호 백자청화매조죽문호(靑華白磁梅鳥竹文壺)이다. 이는 의기(儀器)이기 때문에 중국기형이다. 의기는 왜 중국기형을 닮았는가 하면 조선의 예의는 중국의 예의를 숭상해고 더욱이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인들이 한국도예를 비하(卑下)하려고 중국도예를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으나 이는 당치도 않은 주장이다. 회화는 중국화의 유입이 있었으니 닮을 수 있지만 도예 기술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은 오직 전래의 기법과 체험으로 전래되어 왔으니 뚜껑 형식이 다른 것이다.
한국 도자기의 뚜껑이 덮개로 발전된 역사는 고대(原 三國)의 토기에서부터 시작되어 고려청자, 분청사기를 거쳐 조선으로 전습되어 왔다.
중국 도자기의 뚜껑이 마개 형식인 것도 고대로부터 이어진 전통이다. 양국 도자기의 형식은 전통에 의한 것이니 우리 도자기가 중국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이다. 고려청자에도 덥개로 만들 수 없는 조건인 때는 마개 형식의 뚜껑이 있다. 이는 마개 형식으로 만들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3) 연호관명(年號款名)의 형식
제시 자료에는 받침의 밑면에 강희년제(康㷩年製<1662~1722>)라는 연호가 관명(款銘)되어 있다. 조선 도자기에 중국 황제의 연호를 관명한 것은 조선이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겼기 때문이고 연호는 황제만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관요의 도자기에는 관명의 규칙이 엄격하였다. 즉 청나라 황제 강희(康熙)의 연호를 관명할 경우에는‘大淸康熙年製’ 라고 기명한다. 즉 3字 2行이 일반적이고 2字 2行으로 4자를 기명한 경우도 있으나 반드시 이중원권(二重圓圈)을 두르고 해서(楷書)로 쓰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그런데 이 제시 자료의 경우는 그 규칙과는 다른 관명 방식이다. 즉 이중원권 없이 康㷩年製라고 2자 2행으로 4자가 관명되어 있다. 이는 중국의 관명 방식과 다를 뿐만이 아니라.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강희의 熙(희)자를 정자(正字)로 쓰지 않고 속자(俗字)를 썼다는 점이다. 즉 熙 자의 정자는 몸체 아래쪽에 4점(,,,,)을 찍는다. 하지만 이 유품에는 4 점을 찍지 않고 그 위치에 불火자를 써서‘㷩’자를 썼다. 중국에도 이런 속자가 있는지가 궁금하다. 필자가 살펴본 漢字字典(漢韓大字典, 康熙玉篇, 大漢和辭典, 宋元以來俗字譜, 韓國俗字譜, 五體字彙) 등의 사전 중 (康熙玉篇과 大漢和辭典과 五體字彙)에는 속자(俗字) 혹은 별자(別字)라고 기록되어있고, 여타의 사전에는 없는 글자다. 뿐만이 아니라 도자기 도록에 수록된 명칭에‘㷩’자를 쓴 예는 없다. (도18 참조)
이 유품이 중국것이라면 황제의 연호에 정자가 아닌 속자나 별자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국의 관요가 아닌 지방요의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황제의 연호에 속자를 쓴 사실이 밝혀지면 그 글을 쓴 사람은 생명을 부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는 지방 고을 이름에 황제의 이름자에 쓰인 글자가 있으면 그 고을 이름을 고치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왜 속자를 썼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하여는 당시의 실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희는 청나라 이대 황제 聖祖의 연호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청 황제의 연호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유는 병자호란 때 뼈에 사무친 국치와 왕자의 볼모 등으로 인해 양반(선비)계층의 반발이 더욱 심했다. 따라서 청 황제의 연호인 강희를 쓰지 않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년호(崇禎年號)를 쓴 경우를 역사 문헌과 비문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문경세제의 관문 옆에 조선시대의 비석 수십 기를 모아놓은 곳이 있다. 그 비석의 지문과 건립 일자 등에는 하나 같이 숭정년호를 쓰고 있다) 심지어 왕실에서도 숭정년호를 쓴 경우가 있다. 나라가 망하고 없어진 연호를 쓴 례를 보면 숭정00(干支)후 00(몇 년)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도자기에 연호를 쓰던 학자(선비)가 무심코 손에 익은 글자[속자]를 썼거나 아니면 의식적으로 속자를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4) 국적을 밝히고자 기울인 노력
제시 자료와 유사한 도자기가 미국 뉴욕의‘매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되어 중국 유품으로 분류 되어있고, 도록의 사진에는 뚜껑이 덥혀 있어서 내부의 실황을 알 수가 없기에 소장관인 매트로포리탄 미술관 앞으로 질의의 서신을 보냈다.
제1차 서신(1989년 3월 6일)
“동양도자 12권 (동경, 강담사, 1982)에 실린 귀관의 소장품인 백자청화매화문호의 사진에는 유품의 입에 뚜껑이 덮였고 내부에 대한 설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입(口緣部)이 직립(直立)되었는지? 시유(施釉)가 되었는지? 무유(無釉)인지? 궁금합니다. 뚜껑을 벗기고 입을 볼 수 있는 사진이 있으시면 설명과 함께 보내주시면 한⋅중 도자 연구에 참고하고자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제1차 서신 참조)
제1차 회신 (1989년 4월 11일)이 왔다. 매트로폴리탄 미술관 동양관 담당자 Suzanne G. Valenstein 의 이름으로 된 회신이다. 사진과 함께 설명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 미술관은 동⋅서양관으로 나누어져 있다.)(편지 제1차 회신+사진 참조)
제2차 서신 (1990년 7월 22일)에는 본인 소장(제시 자료)의 사진을 동봉하고, 귀관 소장품의 태토와 유약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자료가 있으면 알려 달라는 간청의 편지를 보냈다.(제2차 서신 참조)
제2차 회신 (1990년 10월 31일)이 왔다. 사진만으로는 시대 추정이 어렵다고 하였고 분석된 자료는 없다고 하였다.(제2차 회신 참조)
제3차 서신 (1990년 11월 20일) 귀관에 소장된 유품은 조선의 유품일 가능성이 있으니 재검토 해달라는 부탁과 함깨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구입처를 알고 싶다고 하였다.(6.25전쟁 당시 한국에서 구입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제3차 서신 참조)
3차 회신에 그는 한국 유품으로는 생각지 않는다고 하고, 매입처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나중에 매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갔을 때 담당자 Suzanne G. Valenstein의 설명이, 어느 수집가가 수집한 많은 유품을 일괄로 매입했기 때문에 미술관에서도 하나하나의 내력을 잘 모른다고 하였다.<수집가가 메모를 하기는 하였는데 분명치가 못하다고 하였다.>)(제3차 회신은 유실되고 없다.)
1992년 2월 12일 하와이에 갈 일이 생겼다. 나선 걸음에 유품을 실견코자 뉴욕의 매트로포리탄 미술관을 찾아 갔다.(떠나면서 담당자와의 상면 예약을 당부하고 떠났다.) 그러나 담당자와의 예약은 30일 후에야 가능하였다. 담당자와 면담 약속은 없었지만 10분간 틈을 내서 만나주었다. 그
먼 길을 찾아 왔는데 외국 나갈 계획이 있어서 충분한 안내를 못해서 미안하다며 25일 후면 시간이 난다고 하였다. 2,3일 더 체류하면서 수박 겉핥기로 박물관을 돌아보고 아쉬운 발걸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귀국해서 사진을 현상해 보니 진열장의 유리가 반사되어 사진이 선명치 못했다. 미국에 주재하는 조카에게 다시 촬영을 부탁했더니 전시품을 바꿔 진열하여서 촬영을 못하고 담당자 Suzanne G. Valenstein 를 만났더니 미국에서 있었던 한국 도자기의 경매를 보고 한국을 다녀왔는데 백선생의 전화번호를 잊고 가서 못 만나고 왔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곧 박물관을 그만 두고 학교로 직장을 옮긴다는 전언을 들은 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그 유품은 한국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유품이나 외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국적이 중국으로 분류되어 있다. 소장관의 분류와는 달리 그 유품이 우리의 것이거나 우리 유품을 모방한 것이라면 물려준 조상들에게 면목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오늘의 무지가 역사의 죄인이 되는 기분이다. 그러나 과학이 나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니 과학적 분석을 통해 국적이 밝혀질 날이 그리 멀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1. 조선 시대의 백자청화의 명칭
조선을 강점한 침략자들은 민족혼을 말살하는 수단으로 사물의 이름부터 바꿨다. 朝鮮 전국의 지명(고을 이름)을 바꾸고 심지어 나라 이름도 朝鮮을 李朝로 바꿨고 도자기의 명칭도 조상 전래의 명칭이던 白磁靑畵를 우리 역사와는 아무련 연고가 없는 빛날 화자를 써서 靑華白磁로 바꿨다. 白磁靑畵는 『朝鮮王朝實錄』에 명확한 기록이 있어서 바꿀 수가 없으니 華자 한 자만 슬쩍 바꿨을 것이다. 이런 저의는 물론 명칭을 바뀐 줄도 모르고 있었다. 명칭이 바뀌어도 유물에는 변화가 없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조상전래의 명칭을 합당한 이유 없이 바꾼 것은 역사와 전통을 단절하는 행위이다. 이런 행위를 우리 스스로가 무의식중에 행하고 있는 것이다.
1) 전래의 명칭
청화백자는 중국 황실에서 조선 왕실에 선물로 보낸오면서 시작되었으니 중국명칭을 그대로 꽃화를 써서 靑花白磁로 쓴 경우와 그림화자를 써서 靑畵白磁로 쓴 경우도 있으나 우리의 공식명칭은 世宗實錄五禮의 樽酌條에 기록된 白磁靑畵酒海라는 사료가 공식 명치이라고 생각된다.
2) 일제강점기의 명칭
조선 왕실의 유물을 토대로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만들고 거기서 한국 도자기를 연구 하면서부터 우리 백자청화의 명칭에 역사적으로 무관한 빛날 華자를 삽입하여 靑華白磁라는 이름을 조작하였고 나아가서는 染付, 吳須, 吳珠라는 일본식 명칭을 드려와 본격적으로 일본화를 시도하다가 그들은 물러갔다.
해방 당시 도자사 관계자들은 이를 비판 없이 이어 받아 지금 까지 靑華白磁라는 명칭이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
유품 감상
1. 전통문양 확인자료
도 1
도 2
『세계도자전집』 1 8 권 「 고 려」 도 72
靑磁象嵌蔓草文水注 (12세기 중엽) (청자상감만초문수주)
『세계도자전집』 1 8권 「 고려」 도 112
靑磁鉄彩象嵌雲鶴紋甁 (12세기 중엽) (청자철채상감운학문병)
도 3
도 4
한국의미 3『이조도자』「분청사기」 도 10
粉靑沙器象嵌牧丹文梅甁 (15세기) (분청사기상감목단문매병)
한국의미 3『이조도자』「분청사기」 도 106
粉靑沙器剝地牧丹文甁 (15세기) (분청사기박지목단문병)
위의 (도1,2)는 고려 시대의 청자 유품들이다. 이 유품의 문양이 주는 이미지는 제시자료와 다름이 없다.
앞의 (도3,4)는 분청사기이다. (도1,2,3,4)의 문양들은 시대가 다르고 사용된 소재와 기법은 달라도 유색(有色) 바탕에 색이 다른 재료로 문양을 나타냈으나 그 이미지는 다르지 않다.
2. 비교 자료 (뚜껑형식)
도 5
도 6
한국의미 5『토기』 도 24
土器臺付壺(토기대부호) (초기철기시대)
『세계도자전집』 1 8 권 「고려」 도 102
白磁甁(백자병) (12세기 전반)
뚜껑의 형식은 덮개와 마개의 두 가지 형식이 있다. 덮개는 한국식이고 마개는 중국식이다.
도 7
도 8
한국의 미 3『이조도자』「분청사기」도 126
粉靑沙器鐵畵唐草文항아리 (16세기) (분청사기철화당초문항아리)
『세계도자전집』 19권「이조」 도 156
白磁胎壺(內.外壺) (17세기)
백자태호(내.외호)
위의 (도5,6,7,8)은 한국 도자기에 전래된 뚜껑 형식이다. 전승을 확인하기 위한 자료들이다. 위로는 원 삼국시대의 토기에서부터 조선 백자에 이르기까지의 뚜껑은 덮개 형식으로 전래되어 왔다.
도 9
도 10
『세계도자전집』 11권「수⋅당」 도 48
三彩貼花文万年壺 (당 8세기)
(삼채첩화문만년호)
『세계도자전집』 14권「명」 도 15
靑花花果文壺 (영락 15세기 전반)
(청화화과문호)
앞의 (도9,10)은 中國 자료들이다. (도9)는 수,당대의 유품이고 (도10)은 명대의 유품이다. 중국 도자기의 뚜껑 형식은 고대부터 마개 형식으로 전승되어왔다.
도 11
도 12
『세계도자전집』 18권「고려」 도 70
靑磁象嵌牧丹唐草文瓢形水注 (12세기 중엽) (청자상감목단당초문표형수주)
『세계도자전집』 18권「고려」 도 87
靑磁象嵌堆花花樹童子文水注 (12세기 중엽) (청자상감퇴화화수동자문수주)
위의 (도11,12)는 고려청자인데도 뚜껑이 마개 형식이다. 덮개 형식으로 만들 수 없는 기형이기 때문이다. 이 뚜껑의 접지 부위에는 받침의 흔적(유약을 바르지 않았거나 내화토 받침)이 있을 것이다. (미확인)
3. 비교자료 <뚜껑받이의 시유(施釉)와 무유(無釉)>
뚜껑받이(몸체와 뚜껑이 맞닿는 부분)에 유약을 바른 경우와 바르지 않는 경우로 한국과 중국의 도자기를 구별 한다.
도 13
도 14
『세계도자전집』 18권「고려」 도 101
白磁鴨形香爐 (12세기 전반)
(백자압형향로)
『세계도자전집』 18권「고려」 도 67
靑瓷象嵌透彫龜甲文手箱 (12세기 중엽) (청자상감투조구갑문수상)
도15
도18
『세계도자전집』 18권「고려」 도 110
靑磁辰砂彩輪花合子 (12세기 전반) (청자진사채윤화합자)
백자청화연구(Ⅰ) 도 18
白磁靑畵七寶文盒 (16세기)
(백자청화칠보문합)
위의 (도13,14,15)는 고려 시대의 청자 유품들이고, (도16,17)은 조선시대의 백자 유품들이다. 우리 도자기는 고려청자에서 조선백자에 이르기까지 도자기의 뚜껑받이에 유약을 시유치 않고 덮어서 굽는 전통은 이어져 왔다. 따라서 뚜껑받이에 태토가 보이는 유품들이다. 이것이 우리 도자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 자료에 조선시대의 유품들을 많이 실지 못했다. 이유는 뚜껑에 대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뚜껑받이가 보이도록 촬영한 사진 자료가 귀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유품의 뚜껑받이에 유약을 바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유품들은 많다. 열거해 보면『호암미술관명품도록』 도121 백자청화운문삼층찬합,『고려대학교박물관 창설55주년기념 도자기명품도록』 도194 백자청화석쇠문합, 도195 백자청화『수복』명 대합, 도196 백자청화지석합,『세계도자전집』 19권「이조」 도177, 178 백자청화길상문합자, 도224 백자청화기하문이층합자,『이조도자 (백자편)』「한국의 미 2」 도100 백자청화화문합 등이다. 뚜껑받이의 실상을 확인코자 소장관을 찾아간다고 해도 관계자의 협조 없이는 확인할 길이 없을 것이기에 서면으로 문의하였으나 아직은 답신을 받지 못하였다.
도 17
도 18
조선도자 500년の 미』 도 100
靑花花鹿文段重(청화화록문단중) (19세기)
『명청자기감정』 340쪽 도 567
康熙款識(강희관식)
앞의 (도18)은 중국 도자기의 관명형식이다. 중국 도자기에 관명규칙은 명대부터의 전승된 형식이지만 여기에는 청대 (관명규칙 <대청강희년제>)의 예를 제시하였다. 한문 사전에는 㷩(희)자를 속자 혹은 별자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도자기 도록에 㷩자를 쓴 경우는 없었다.
도 19
도 20
『세계도자전집』 15권「청」 도 195
豆彩団龍文壺 (대청 옹정년제)
(두채단용문호)
『세계도자전집』 15권「청」 도 27
桃花紅文房具 (대청 강희년제)
(도화홍문방구)
위의 (도19,20)은 중국 청대의 도자기이다. 중국 도자기는 청대뿐만이 아니라 역대 도자기의 뚜껑받이에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한국 도자기와 구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고 생각한다.
4. 비교자료 (문양과 필법비교)
도 21
제시자료
도 22
『세계도자전집』 1 5 권 「청」 도 1
靑花白梅文甁 (강희 1662~1722)
(청화백매문병)
시대비교,
앞의 (도21,22,23).의 유품은 모두 같은 시대 (康熙年代-강희년대)의 유품들이다. 그러나 제시자료(도21)에는 康㷩年製(강희년제)라는 관명이 있으나, 참고자료(도22,23)에는 연호관명이 없다.
기법비교
배지(背地)의 채화기법 비교
도 23
『세계도자전집』 15권「청」 도 135
靑花白梅文壺 (강희 1662~1722)
(청화백매문호)
제시자료(도21)의 경우는 유품 전체를 청화안료로 채화할 때 화필로 매화 잎 한 잎 한 잎을 그려서 채색하였으나 (도22)의 경우는 큰 솔로 한 번에 쓴 듯하고 (도23)의 경우는 덤벙 기법으로 처리한 것 같다.
필법비교
제시자료(도21)의 꽃술을 그릴 때 붓의 운필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운행되었다. 따라서 꽃술을 한 번에 완성하였는데 반하여 참고자료(도22,23)의 그림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그렸기 때문에 꽃술 끝 하나하나에 다시 점을 찍어서 점으로 하나의 원을 형성하고 있다.
참고자료(도22,23)의 매화 문양은 같은 화가의 솜씨이거나 아니면 하나의 채본으로 모사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림의 구성과 꽃술을 그린 세필의 터치가 같기 때문이다.
꽃문양의 확대 비교
(도21의 1)은 (도21)의 매화의 꽃 일부를 확대한 사진이다. (도22의 1)은 (도22)의 매화 꽃 일부를 확대한 사진이다.(도23의 1)은 (도23)의 매화 꽃 일부를 확대한 사진이다. 이러게 확대해서 비교하니 필법의 다름이 확실하다.
예술성과 모방성
제시자료(도21)에는 예술적인 창조성이 보이지만 참고자료(도22,23)의 그림에서는 대량 생산을 위하여 기법이 간소화되었음을 볼 수가 있다.
이 백발 문양의 개발은 우리의 선조들이 역대 문양에서 재창조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였으나 많은 양을 생산하지는 못한 듯하다. 이유는 청화안료가 고가이고 또 구하기도 어려웠던 탓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청화안료가 풍부한 중국에서는 많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고할 수가 있다. 이렇게 추고하는 것은 상감 기법이 우리 역대 도자기의 전통 문양 기법이기 때문이며, 참고자료의 문양들은 양산(量産)을 위하여 복제되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기법은 중국 도자기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음에 제시한 자료들은 도광년대(道光年代: 1830~1880년)의 유품들이다. 이 유품에 나타난 문양들은 우리 조상들이 개발한 기법이 중국 도자기에 뿌리를 내리고 발전한 실상이다.
5. 문양과 기법의 변화와 발전
문양의 변화
청색배지(靑色背地)에 백발로 문양을 묘출하는 기법이 중국에서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즉 (도24) 화병의 문양을 보면 역상감 기법의 문양을 배경으로 화창(畵窓)을 열고 그 창속에 여러 종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문양은 제시자료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기교가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기법의 변화
제시자료의 기법(뚜껑받이에 유약을 바르지 않는 기법)이 중국에 전해진 후 중국 도자자기에도 뚜껑받이에 유약을 바르지 않는 기법의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즉 (도25) 이 화병의 입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았다. 이는 중국 도자기의 뚜껑받이에 유약을 바르지 않는 기법이 도광 년간(1830~ 1880년)에 이르러서는 보편화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조선에서 개발된(逆象嵌)기법과 뚜껑받이에 무시유(無施柚)의 기법이 중국 도자기에 활용 발전하고 있다.
참고자료 5
매트로포리탄 미술관과의 왕복 서신
제1차 서신 제 1차 희신
재2차 서신 2/1 제 2차 희신
제 2차 서신2/2
제3차 서신 제 3차 회신 유실
매트로포리탄 미술관의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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