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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지정 중요문화재 도록 5 고려백자 경통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968
비 지정 중요 문화재 도록

5. 고려백자 경통

전체 높이65,2㎝,동체 높이47㎝, 뚜껑 전체 높이18,2㎝, 접합 지름 6 ,
입 지름 7㎝, 밑 지름 9㎝. 새 문양의 높이 10㎝.
연구목차

서론
1. 신기한 형상(形象)
2. 소조(添畵)적 조형
유품 감상
1. 시대성
1) 초조대장경과 경통
2) 고려대장경과 경통
3) 경총(經冢)과 유품
4) 유품의 자질(磁質)과 경판과의 관계
2. 예술성
1) 고려 백자 초기의 기형
2) 상상을 초월한 문양
3) 조각[添畵]의 아름다움
3. 희귀성
1) 처음 보는 희귀한 문양
2) 경통의 수량
3) 주술적 의미 (심오한 종교철학)


서론
고려자기의 시원에 관한 지금의 연구는 9세기말에서 10세기 초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그러나 이 주장도 고증 사료에 의한 연구는 아니다.
신라시대까지 토기를 굽던 땅에서 갑자기 자기가 출현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 고려자기이다. 그러니 발생 과정에 중국 도예 기술이 도입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들이 통설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들에는 사실적 전거도 역사적 개연성도 없으니 많은 의문을 안고 있는 주장들이다.
지금의 세계는 수 만 가지의 기술이 나날이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당시 당나라의 도예 기술은 지금의 원자 핵 무기를 만드는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기술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당나라는 비단과 도자기 수출로 국부를 이뤘고, 서구 세계와 활발히 교역하던 무역품의 하나였다.
나라의 수입원인 도자 기술을 조건 없이 고려에 전하였다는 주장은 상식을 벗어난 주장이다. 당시 중국의 도예기술이 고려에 전해졌다고 한다면 중국은 기술을 전수하는 조건으로 보다 큰 국익을 위해서 기술 전수를 결행 하였을 것이다.
역사상 당나라가 한반도를 상대로 국가 이익을 걸고 모험을 결행 할 만 한 사건은 나·당 전쟁 밖에 없다. 그 때의 나·당 동맹은 서로의 국가적 이익을 위해 채결한 것이었지만 당의 속셈은 한반도 자체(백재·고구려·신라)를 정복하려는 야욕이 있었다. 이는 후일 동맹을 깨고 전쟁으로 발전한 결과가 확실한 증거가 된다.
나·당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당의 야욕은 수포로 돌아갔고 본의 아니게 도예 기술만 전해졌던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필자의 저서『백자청화연구』Ⅱ권의 3편 「고려청자 발생 시 당의 도예 기술이 유입된 경로에 대한 시론>에서 상술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글은 필자의 블로그 주소(http://blog.naver.com/bbooheum)&
(http://blog.daum.net/booheum)에 있습니다.

위의 연구가 지금은 시론으로 제시하였지만 확실한 증거 자료가 나타난다면 정론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의 시론이 정론으로 입증에는 두 길이 있다고 봅니다. 그 하나는 중국 역사학계에서 전쟁사를 연구하는 자료 중에 나·당 연합군을 편성할 당시, 군용식기를 현지(점령지)에서 제조 공급할 목적으로 공병의 일원으로 도공을 모집하였다는 사료가 발굴되는 일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당나라에서 유럽 쪽으로 수출한 도자기 중에 한국의 흙(胎土)으로 만든 유품이 있다면 필자의 가설은 정론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려자기에는 청자와 백자가 있었고, 그 제조 시기는 고려 전 시대를 걸쳐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 송나라와 교섭하던 고려 전기에는 백자를 만들었으나, 몽고가 침입한 후기는 백색을 기피한 사료가 있으니 이때를 계기로 백자의 생산은 중단되었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재 유존된 유품도 후기의 것은 없습니다. 백색을 기피한 사료는 고려사에 있습니다.
즉 “忠烈王 원년(1275) 6월에 大司局 이 말하기를 東方은 木의 方位이므로 색은 마땅히 청을 숭상하여야 할 것인데 白은 金의 색이라 국인이 戎服(몽고식 복장)을 입은 뒤로부터 많이 白紵衣로 웃옷을 삼으니 이는 木이 金에게 制壓을 당하는 상이므로 청컨대 백색의 의복을 금하게 하소서. 이를 聽從하였다”...“25年 9月에 다시 白衣와 白笠을 禁하였다.”『高麗史』 第七 志三 高麗史 第卷85 (東亞大學校古典硏究室 1987) 639쪽
이 기록으로 보아 1275년 이후는 백자를 만들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료는 이렇지만 실재 백자 생산은 고종 19년(1232)몽고군의 침입 시부터 생산은 중단 되었을 것입니다. 몽고군은 전국토를 유린하였습니다. 그러니 피난길이 바쁜데 누가 백토를 채굴하고, 누가 굽고, 누가 백자를 썼겠습니까? 따라서 고려 후기에 백자 생산은 없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이성계의 발원문이 새겨진 백자 유품 다섯점(백자완 4 향로 1)이 조선 건국 일 년 전에 예외로 있을 뿐입니다. 野守 健 著, 「白磁」,『高麗陶磁の 硏究』(東京 :圖書刊行會, 1972), 46-49쪽.

고려백자의 생산 시기(추정 년대)는 도자기 질(質)의 변화로 시대를 분별할 수 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연구를 참고로 본 유품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鄭良謨의 주장
“고려백자가 청자에 비하여 그 수량이 백분의 일도 되지 않지만 남아 있는 실물로 증명이 되는 9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기 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고려백자의 분명한 발달 과정과 편년이 분명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鄭良謨 著『韓國의 陶磁器』「總論」(서울, 韓國美術叢書,1991)300쪽

姜敬淑의 주장
“12세기 중엽 이후 청자에 상감 기법이 도입되는 반면 백자는 연질계 백자에서 벗어나 경질계 백자의 제작으로 이행했음이 유천리 도자편을 통해서도 파악되며” 姜敬淑,「高麗時代 陶磁」『韓國陶磁史』(서울, 一志社, 1989) 239쪽

金載悅의 주장
“용인 고려백자요지의 출토품 중에는 외견상 과연 백자인가 의문을 가질 정도로 유색이 청색이나 녹색을 많이 띈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 ” 金載悅 著 『高麗白磁의 硏究』(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문학석사 학위논문, 1987)6쪽

이상의 연구 자료를 참고로 유품을 감상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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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품감상

유품의 현황
본 유품은 동체와 뚜껑으로 구성되었으며, 유품에는 여섯 종류의 문양이 시문되어있다.
태토는 곱게 정선되었으며, 유약은 약간 푸른빛이 있다. 유약이 고열(高熱)의 영향인 듯 유 몰임(釉溜)이 있고, 미세한 빙렬이 있다. 동체의 하부[高臺 部分]에는 산화가 있고 고대의 내부는 시유의 흔적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산화가 진행되어 태토가 드러나 있다. 뚜껑은 마개 형식이며 뚜껑과 동체의 접합 부위에는 시
유 되지 않았다.


본체의 고대부분
본 유품은 자질 자체가 연질이기도 하지만 매장토의 영향으로 산화가 많이 진행되어 고대 내부는 시유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본체 배면의 사진 새 문양의 배면


뚜꺼의 접합 부위

우리 도자기의 공예 기법의 사용되는 용어는 象嵌· 陰刻· 陽刻· 彫刻· 透刻· 塑造· 堆花 등의 용어들이 있다. 그러나 본 유품의 문양 기법은 조각이나 퇴화 기법이 아니고, 문양의 물형을 따로 만들어 붙였다. 이런 기법은 고신라이 토기에 있었던 기법이다. 그 때의 설명에는 “만들어 붙었다”라고 하였다. 이 “만들어 붙었다”는 말은 설명문은 되지만 도자기 기법의 용어는 아니다. 그러기에 첨화(添畵)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바른 표현일 듯하다. 그러나 우리 국어사전에 첨화라는 용어는 없다. (그래서 국립국어원에 첨화(添畵)라는 도자기 용어의 신설을 요구 하였다, 국어원의 승인이 나기 전에 첨화라는 용어를 쓰고자 한다.)

1. 시대성

1) 초조대장경과 경통
우리 도자기에 기년명이 각인된 유품이 희귀하니 유품의 시대추정에 어려움이 있다. 본 유품도 제조시기에 대한 기명은 없다.
그러나 본 유품은 경통이라는 특수성이 있는 유품이니 시대 추정의 범위가 좁혀진 셈이다.
유품의 산화로 보아 매장 유품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불경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어느 경총(經冢)에 매장되었던 유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초조대장경판(初雕大藏經板)은 고려 현종 2년(1011)에 시작하여 1087년 고려 선종 4년에 판각을 완성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때의 것이라면 1011-1087년 사이가 제조 시기가 된다. 대장경 각판과 경통 매장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경판의 각을 완료하고 첫판을 인출(印刷)하여 경통에 담아서 매장하여 미륵이 나타날 때까지 불경을 전한다는 것이 불가의 사상이고 형식이다. 따라서 인출된 경을 경통에 넣어서 매장하고 경총을 설치하는 것이 불가의 의식이다.(경총에는 탑을 세우는 경우도 있다.)
경판을 완성하고 첫판을 인출(印刷)하여 이 경통에 담아서 매장하였던 것이 라는 가정 하에 살펴보기로 한다. 이렇게 가정하는 이유는 경통의 문양이 불교와 관계가 깊고, 경통의 자질이 연질이기 때문이다.

2) 고려대장경판과 경통
고려대장경판(高麗大藏經板)은 고려 고종 19년1232년 몽고군이 침입하여 초조대장경판을 불태웠기 때문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가 중심이 되어 경판도감을 설치하고 1236-1251년까지 16년간에 완성하였다. 그러니 이때도 경통을 매장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본 유품이 고려대장경판과 관련이 있다면 1236-1251년까지의 기간에 만든 것이 된다.

3) 경총(經冢)과 유품
본 유품의 기형도 일반 생활용기와는 다르고 문양에도 불교적 요소가 담겼으니 범인으로는 해석이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고 자질에 산화가 있으니 땅에 매장되었든 유품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점이 경총에서 출토된 유품으로 보는 이유이다.

4) 유품의 자질과 초조대장경과의 관계
본 유품에는 산화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유색으로 보아도 고려백자 초기유품에 나타나는 청색이며 유 몰림 또한 초기유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초기백자는 연질이라는 것이 일반 적인 통설이다, 그런 가운데 학문적 연구에서도, 고려 백자는 12세기 중엽을 경계로 연질에서 경질로 전화하였다는 연구가 있다. 姜敬淑,「高麗時代 陶磁」『韓國陶磁史』(서울, 一志社, 1989) 239쪽.
본 유품의 시대추정을 위의 연구에 따르면, 12세기 중엽을 경계로 연질에서 경질로 전화하였다고 하였으니 본 유품의 자질은 연질이고 제조 시기는 11세기 초에서 중반에 걸쳐진 시기에 만든 것이니 초조대장경과 괄연히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2. 예술성
1) 고려 백자 초기의 기형
본 유품은 동체가 47㎝, 뚜껑이 18,2㎝, 총장 65.2㎝, 높고 스마트(smart)한 기품을 가춘 유물이다. 그러니 헌칠하여 아름답기도 하지만 문양이 신기하고 기법도 특이하다. 군사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거란군의 만행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온 민족의 혼이 서린 의기(儀器)이다.

2) 상상을 초월한 문양
본 유품에는 모두 여섯 종류의 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뚜껑의 새 문양

새 문양의 전채 모습 새의 눈과 머리의 모습
높은 동체의 뚜껑에는 새 문양이 장식되었다. 큰 부리를 콱 다
물고 양쪽 날개는 접은 채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을 듯 볼록 티어 나온 두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눈은 양각인 듯 퇴화(堆花)인 듯 도두륵하게 튀어 나왔으며 귀는 한 쪽 (왼쪽)에만 작은 구멍이 있다.
조각된 새의 부리로 보면 단학(丹鶴)의 모습 같으나 꼬리가 길고 다리가 짧으니 단학 종류의 새는 아니다. 뿐만이 아니라 새의 머리에는 불상의 머리에 새겨진 나발(螺髮)과 같이 오른 쪽으로 틀어진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니 이 새는 무상(無上)의 기원에 감응하여 부처님 세계에서 보내 온 새 라고 할 수밖에 없다.
새 문양의 기법은 양쪽 날개와 꼬리는 따로 만들어, 붙일 장소에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붙었다. 이 기법은 古新羅의 土器土偶裝飾長頸壺와 高麗靑磁透刻及彫刻香爐에서 활용되었던 기법이다.


古新羅土器,土器土偶裝飾長頸壺: 朝鮮古蹟圖譜3464호 靑磁透刻及 彫刻 香爐
위의 고신라 토기에서는 사람과 개구리 등의 물상을 따로 만들어 붙었다. 그 기법이 고려로 이어졌다. 위 향로의 경우는 여러 조각의 입(葉)을 붙인 문양이다. 이때부터 물형을 따로 만들어 붙이는 기법은 전래되어 왔다는 증거가 된다.

일제의 역사왜곡에 감염된 눈으로 보면 일상 보던 우리의 유품과 다르거나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유품은 중국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기에 중국자료를 함께 검토하고자 여기에 중국 유품의 사진을 제시한다.




世界陶磁全集11卷 隨-唐 圖 20 世界陶磁全集11卷 隨-唐
白磁磻龍博山爐, 隨-唐 (7世紀) 褐釉粘花甁(隨 6-7世紀)

위의 유품 두 점은 중국 수·당 때의 유품이다. 이때의 중국 자기는 연질백자였다. 중국은 이때 벌써 백자를 구웠으나 우리는 토기를 굽고 있던 시대이다. 그러다가 고려에 와서 갑자기 자기가 발생하여 비약적으로 발전 한 것이 고려자기 이다.

世界陶磁全集12卷 宋 圖12 정요 世界陶磁全集12卷 宋 圖25
白磁唐子靈芝枕(11-12世紀) 靑白磁牧丹文瓢形水注(11世紀)

위의 유품 두 점은 송백자이다. 송나라는 고려 전기에 우리와 교섭이 있었던 나라였다. 송 백자는 청백자(靑白瓷)의 과정을 거쳐서 백자로 발전하였는데 천백자의 시절부터 경질백자로 발전하였다.

본 유품의 기형과 문양도 중국 도자기와는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도자기이 자질이다. 본 유품의 자질은 연질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중국 도자기에 연질 백자는 없고, 오직 경칠백자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중국과 우리의 도자기는 질적으로 다른 점이다. 우리 고려 백자는 12세기 전반 까지는 연질백자이다.

(2) 뚜껑의 밑 둘레에 부착된 네 개의 고리

뚜껑에 설치된 고리
뚜껑의 아래쪽 둘레에는 네 개의 고리가 부착되어있다. 이는 통 속에 경문을 넣고 미봉하기 위한 고리일 것이다.

(3) 十二支像


동체를 한 바퀴 둘러 十二支像이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순으로 조각되어있다. 이 十二支像의 문양은 별도로 만들어서 하나하나 입체로 부착되어 있다. 十二支像은 각기가 위치한 전방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佛器에 十二支像을 조각한 것은 밀교(密敎)와의 관계인 듯 하지만 십이지상은 신라시대의 王陵에도 배열된 바가 있고 고려청자의 탁잔에도 시문 된 례가 있다.

朝鮮古蹟圖譜 3591번의 高麗靑瓷, 十二支像이 施文된 托盞
당시 사회의 지배 사상이던 오행설과도 관계가 있고, 주역과도 관계가 이는 문양이니 어떤 뜻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지 조심 스렵다.

(4) 용 문양

용의 머리 부분의 문양 몸체의 중간부분의 문양 꼬리 부분의 문양
하늘은 용이 지키려는 듯 용문양이 하늘에 있다. 용문양이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용과 우리용은 너무 다르다. 특히 이 유품의 용문양은 기상천외(奇想天外)하다. 중국의 용문양은 황제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지정되어 일정한 규격이 있다. 즉 얼굴은 백호와 닮고 눈은 작고 턱은 뾰족하고 이마는 튀어나오고 눈알은 잉어의 눈알이고 몸은 뱀을 닮고 발톱은 황재의 경우는 오조(五爪)이다. 그러나 우리의 용은 이름그대로 상상의 동물이다. 그리는 사람의 재능에 따라 거북의 몸에 용의 머리를 조각한 비석 받침도 있고, 도깨비 눈이나 사람의 성난 눈을 그린 경우도 있다. 상상의 동물이라도 전례를 닮는 경우가 있는데 이 유품의 문양은 전례가 없는 용이다.
머리는 용의 머리인데 몸체는 卍자이다. 무상의 기원에 감응하여 천상에서 내려 보낸 용이라고 밖에 필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문양(5)번의 얼굴은 말(馬)을 닮았으니 말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몸집이고 문양 (6)번은 구름이라고 보이나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니 독자 여러분의 고견이 요구됩니다.

5번 6번
3. 희귀성
1) 희귀한 문양
거란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퇴치하기 위하여 無上의 대원을 발하여 대장경판을 판각하기로 서원한 뒤 거란 군이 스스로 물러 간 효험으로 대장경을 판각하였으니 판각은 판각 되로 경통은 경통 되로 정성을 다했을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문양으로
보면 지상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2) 경통의 수량
고려대장경판각을 완성한 때도 초조대장경판각 때와 같이 경통을 매장하는 의식을 치렀을 것이니 그 경통이 발견된다면 두 개의 경통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문양은 다를 것이다
이 박에도 경통은 더 있을 수 있다고 생각 된다. 사찰의 스님들은 학승(學僧)이 아니라도 중요한 경은 암송할 것이고 여타의 경들은 책으로 준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독실한 신자들의 경우는 집에서 경을 독송(讀誦)하자면 경을 담는 통이 있었을 것이다. 많은 경우 대나무 통으로 손쉽게 만들었겠지만, 개중에는 귀한 자료로 만든 귀중품도 있었을 것이다. 이 귀중품들은 대를 물려 전승되었을 것이지 땅속에 묻는 경우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 대장경 판각과 과계되는 경통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고 고려대장경과 과계되는 경통이 발굴 된다면 두 게가 있을 수 있다.

3) 주술적 의미
본 유품은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오랑캐의 만행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민족의 염원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대원을 담은 판각이었으니 그에 수반된 경통의 문양은 인간의 상상으로는 해석 조차할 수 없는 주술적 의미와 심오한 종교철학이 담 겼다고 생각되는 문양이다.
이 경통은 대장경판각과는 짝이 되는 유품이니 경판과 함께 세계문화재로 등록 될 가치가 있는 유품이라고 생각 된다. 이상

사진은 필자의 다움 블로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booh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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