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질의서
수신: 전 국립중앙 박물관장 鄭良謨 귀하
질의자 : 백부흠 (白富欽)
주소 : ♀ 614-809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백양대로 208번길 133
(개금동 1-4 삼환아파트) 202-603
전화 : 051) 892-0707 / 010-3560-5757
이메일 : booheum@hanmail. net
블로그 : 1. http://blog.daum.net/booheum
2. http://blog.naver.com/bbooheum
1. 질의
1) 질의를 공개로 하는 이유
책을 읽다가 의문이 있으면 저자에게 직접 문의하여 사적(私的)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 鄭良謨(전 박물관장)와는 생면 부지한 사이도 아닌데 공개로 질문하는 것은 역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누구 개인의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 전체의 과거이고 또한 미래이기도합니다. 명예로운 역사는 민족의 영광이고 자랑이며 긍지이기에 비틀어진 역사를 바로 잡아야 내일로 가는 길도 바른 길이 열릴 것 이라는 생각입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자면 질문자의 의문을 질문자 혼자만 해결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전체 국민 모두의 이해가 있어야 하겠기에 질문을 공개로 하는 것이니 국민 모두가 이해하고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성실히 답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질의 내용
(1) 명자모방설(明磁模倣說)
(2) 사료를 조작한 왕명무시론 (王命無視論)
(3) 민족의 고민
위의 세 가지 문제는 귀하와 직간접으로 관계가 있고 왜곡된 도자사를 바로잡는 일과 유네스코에서 세계의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한『朝鮮王朝實錄』과 관계가 있은 문제이기에 질문을 드립니다.
〈1〉 명자모방설(明磁模倣說-조선 백자청화는 명 백자청화의 모조품이라는 뜻). 우리 백자청화에 관한 연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明磁模倣說은 1942년에 笠井周一郞에 의해 처음 시작된 연구이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인학자 笠井周一郞은
“支那[중국]와 조선 청화의 關係를 美術工藝史的으로 觀察하면 조선 도자사는 發達史가 아니고 退步의 過程이라는 感이든다. 그 이유는 조선이 明나라를 宗主國으로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明나라의 도자기를 모방한 것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중국 陶藝가 찬란한 꽃을 피우고 시들 무렵에 그 기술을 朝鮮에 이양하였기 때문이다.” (笠井周一郞 著,『李朝染付』(東京: 寶雲舍, 1942), 25쪽)
“李朝의染付[청화]의 最初는 宣德청화를 憧憬하였지만 實際 그 안료를 廣州의 官窯에 받아들여 청화를 시작 한 시기는 世祖대에 와서 이다. 그때는 이미 宣德이 20餘 年이나 지난 시기이다, 그러니 景泰 末에서 天順, 成化에 걸쳐지며 明에서 받아들인 顔料는 宣德의 蘇泥勃靑이 아니고 成化에서 正德, 嘉靖, 萬曆의 回回靑이 쓰였다고 想像된다.” (笠井周一郞 著,『李朝染付』(東京: 寶雲舍, 1942), 108~109쪽) 라고 하며
우리 백자청화사의 연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하는 연구에서 笠井周一郞은 『慵齎叢話』「陶磁編」에 〈求回回靑於中國〉 이라는 사료가 있고 당시는 조선과 명나라와는 주 종 관계에 있었으니 이렇게 연구한데는 별로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런 연구를 하다가 해방이 되어 일본은 물러갔다.
이를 물려받은 崔淳雨의 글은「廣州 道馬里 白磁窯址 發掘調査略報」에서 볼 수가 있다.
崔淳雨가 쓴 發掘調査略報
“이 가마에서 출토되는 백자기들의 기명양식을 관찰해보면 거의 명조의 기명양식이 짙게 도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이러한 기명 制式은 곧 전국의 도요에 영향을 준 것은 물론이다.”
(註) 傘井周一郞 著 『李朝染付』156면 참조. (崔淳雨 著, 「廣州 道馬里 白磁窯址 發掘調査略報」(考古美術 통권 59권,1965), 87쪽.
이렇게 傘井周一郞의 명자모방설을 지지하던 사람이 崔淳雨와 鄭良謨였다. (鄭良謨는 해방 당시 11살 이었는데 어찌하여 崔淳雨와 같이 傘井周一郞의 모방설을 지지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알 길이 없다.) 廣州 道馬里 白磁窯址 發掘의 주관은 崔淳雨가 하였으나 鄭良謨의 각고의 노력에 힘입는바 크다고 하였으니 발굴 유물과 파편 정리는 鄭良謨가 하였을 것이니 그의 견해를 보자
鄭良謨는 그의 저서에서
“수입 回回靑으로 문양을 그린 선명한 발색의 器皿이다. 이를 다시 세분해 보면, 회회청 사용의 첫 번째는 경기도 廣州郡 退村面 道馬里 또는 牛山里등의 초기 가마에서 발견되는 데 중국 明初의 기형 유약 또는 굽깎기까지 똑 같은 그릇에 회회청으로 明代 文樣과 똑 같은 문양을 그린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언뜻 보면 중국에서 수입된 기명이라고 생각 할 정도로 중국 明청화 그릇과 거의 같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鄭良謨 著 ,『韓國의 陶磁器』,「廣州分院 窯址에 對한 編年的 考察」, 韓國美術 叢書, (서울: 文藝出版社. 1991). 452쪽). 하지만 파편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질의자의 주장>
위의 설명은 이론상 모순이 있다.
조선에서 백자청화를 제작한 시기에 관한 연구는 문헌으로는 世祖 元年이고 발굴된 유품은 世祖 2年(1456)에 제작된 興寧府大夫人墓誌銘이다. 그런데 명초의 회회청으로 명 청화와 구분 못할 정도의 파편이 출토되었다는 말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고, 명자모방설을 주장한 笠井周一郞도 宣德의 시대는 지나갔고, 성화이후의 안료를 사용 했다고 하였으며, 명나라가 청화 기술을 조선에 이양(移讓)한 것으로 연구하였으나, 지금은 정 반대의 사료가 발굴되었다.
명나라는 청화안료의 수출을 금하였다는 사료이다. 그러니 우리 국보 176호「홍치」명 송죽문호는 누가 봐도 중국 도자기와는 다른 형태의 유품이다. 그런데 발굴 파편은 명초의 것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았다고 하니 그 파편을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발굴 파편은 보관되어 있을 것이니 지금이라도 공개하여 실물을 보여 주어야 이해가 될 것 같다.
명자모방 설은 1942년 일본인들이 조선도자사의 연구를 시작하면서 당시의 사료로는 그렇게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때의 연구를 부정해야 할 사료들이 발견되었다. 즉 명 청화를 양여(讓與)했을 것이라는 연구와는 정 반대로 명나라가 청화안료의 수출을 금지하였으니 조선 청화는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기형과 문양이 중국 도자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 명나라가 청화 안료의 수출을 금지하였던 이유는 명나라의 무역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도자기 수출로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으니 이웃 나라가 도자기 수출의 경쟁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청화안료의 수출을 금하고 국외로 유출되지 못하게 엄한 금령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니 조선의 백자청화는 밀수입된 청화 안료로 고려 때 회고려(繪高麗)에 붓으로 채화하던 경험이 있으니 그 기법으로 조선 청화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그러니 중국 도자기와는 닮을 이유가 없다. 그 증거가 우리 국보 176호와 219호의 백자청화 유품이다. 이 두 유품은 문양과 기형이 명 청화와는 확실히 다르다, (도1,2,3,4참조)
명나라가 청화 안료의 수출을 금지한 사실은 우리『朝鮮王朝實錄』에도 명문의 기록이 있다. (『世宗實錄』30년 3월 3일 : 『中宗實錄』36年(1541)12月 28日(己卯) 1번째 기사: 佐久間重男『世界陶磁全集』14「明」明代の 陶磁と歷史的背景: 『대명률』의 私出外境及違禁下海의 조항: 明史 中 靑畵磁器에 對한 規制등 이다.)
이와 같이 이론과 유품이 일치하는 것이 현재의 연구인데 귀하는 현재의 실황은 외면하고 70년 전의 연구를 답습하여 廣州郡 退村面 道馬里 또는 牛山里등의 초기 가마에서 발견되는 파편이 明初의 기형 유약 또는 굽깎기까지 닮았다고 하는 설명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귀하의 주장은 귀하 본인의 연구가 아니고 笠井周一郞의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으니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질의자가 명 청화 도록에서 우리 국보 도자기의 기형과 문양이 닮은 명 청화 유품을 찾고자 여러 도록을 뒤졌으나 닮은 기형은 없었다. 중국 도자기는 성화 년대 이후는 대형 자기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국보와 같은 호형(壺形)의 기명이 없었다. 이는 조선 백자청화가 중국 백자청화를 모방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러 도록을 뒤지다보니 景德鎭 民窯의 청화자기에 호형이 있기에 비교 도록에 등재하였으나 기형과 문양은 판이하게 다르다.
도1 도2
국보 176호 『조선 백자전Ⅱ』 국보 219호 『조선 백자전Ⅱ』
「弘治」명 백자청화 송죽문호〈도2〉 송죽문호〈1〉
高48.7㎝,口徑13.1㎝,底經17.8㎝ 高41㎝,口徑15.7㎝,底經18.2㎝.
중국 도자기는 성화 년대부터는 대형 기물을 만들지 않았으니 우리 국보와 유사한 호형(壺形)의 유물이 없어서 이형(異形)의 유물을 제시하였다.
도3 도4
明磁 名品 圖錄 成化, 弘治, 正德. 中華磁器全集 19 江西博物館 所藏
靑畵五龍玉壺春甁 成化窯(15世紀) 景德鎭民間靑畵磁器 圖54 (15世紀)
高27.2公分, 深25.3公分 高25.8㎝,口徑4.9㎝
口徑6.1公分, 足經9,2公分
중국 도자기는 조선에서 청화자기의 생산을 시작할 무렵인 世祖[성화, 홍치] 연대에는 청화자기의 시대를 지나 색회자기(色繪磁器)로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 밝혀진 사료는 명나라에서 청화안료의 수출 금단품(禁斷品)으로 지정한 사료이다. 그러니 우리 국보 176호와 219호는 중국에서 밀수로 들어온 안료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만들었으니 중국 백자청화와는 닮을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명나라가 청화 안료의 수출을 금지한 사료가 발굴되었으니 조선 白磁靑畵史는 명자모방 설이 아닌 새로운 백자청화사를 연구하여야 도자사가 바른 길로 갈수 있을 것이다.
鄭良謨는 해방 후 60여 년간을 명자모방설을 주장 해왔다. 그 주장이 笠井周一郞의 모방이던, 본인의 연구이던 간에 지금까지의 주장은 명자모방설이었다. 역사는 사료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하니 새로운 사료가 발굴되었으면 그 해석도 바뀌어져야 한다. 새로 발굴된 사료를 무시하고 과거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유품과 이론이 괴리되어 실제와 맞지가 않는다.
우리 국보 176호인 「弘治」명 송죽문호를 명 청화와 비교하면 닮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鄭良謨는 도자사 연구에 일생을 바쳤지만 새로 발굴된 사료에 의한 새로운 연구를 하지 않고 과거에 집착하여 현실과 괴리된 주장을 고집한다면 일생의 공적이 허사가 될 뿐만이 세월이 지나면 역사의 죄인이 될 수도 있다.
鄭良謨는 자기가 스스로가 새로운 백자청화사를 쓸 능력이나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면 후학들에게 새로운 백자청화사를 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2> 왕명무시론(王命無視論)
鄭良謨는 1980년 일본 동경에 있는 출판사 小學館에서 발행한 『世界陶磁全集』19「李朝」에〈李朝陶磁の 編年〉이라는 제하에 글을 쓰면서 『朝鮮王朝實錄』에 왕명으로 반포된 금령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왕명무시론를 주장하였습니다. 글의 내용을 보면 왕명을 무시하기 위하여 『中宗實錄』의 원문을 날조하고 일부 사료는 은폐까지 하였다.
왕명무시는 일제강점기 일인들이 조선 도자사를 신설하면서 왕명무시의 글을 썼습니다. 1934년 일본인 山田萬吉郞이 조선 도자사를 기술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려니 『朝鮮王朝實錄』에 왕명으로 반포된 금령이 명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를 인정하면 도자사를 왜곡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정면으로 부정하면 비판을 받을 것이니 이를 피하는 방법으로 “『朝鮮王朝實錄』에 왕명으로 반포된 금령이 있기는 하지만 그 금령이 얼마나 지켜졌을는지? 령(令)이 령(令)으로 끝난 것은 아닐지?”(山田萬吉郞 著, 民間使用に 就で」. 陶磁 第六卷 第 四號 (東京 : 東洋陶磁硏究所, 1934), 18쪽 : (浜口良光 著,『朝鮮の 工藝』, (東京: (株)美術出版社, 1966), 47쪽. 라고 왕명을 무시하고 우리 도자사를 왜곡하였고, 그 뒤를 이어 浜口良光이 1966년에 『朝鮮の工藝』라는 책에 山田萬吉郞과 비슷한 주장을 하면서 도자사를 왜곡하였으나 뒤에 이어지는 글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질의자의 생각〉
군주 국가의 왕명은 곧 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그들이 아니었기에 역사 왜곡을 목적으로 하는 그들에게 왕명으로 반포된 금령은 그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데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장애물이었을 것입니다, 침략자들의 장애물을 귀하[정량모]가 자기의 조상(그것도 임금)을 깔아뭉개면서 그들의 소망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이 글이 발표 된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비판하는 사람도 없으니 질의자는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읽고 또 읽어 보아도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은 풀리지 않아서 공개로 물어 보기로 합니다.
1) 사료[原文]의 날조
이 논문에 인용된 사료는 『中宗實錄』32년 12월 19일의 두 번째 기사입니다. 이 날은 기사가 많아서 5개항으로 나누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논문에는 5개 항 중 2번째 사료를 날조 인용하고 4번째 사료는 은폐(隱蔽) 하였습니다.
사료를 어떻게 날조 하였으며 어떤 사료를 은폐 하였는가? 원문과 역문을 살펴봅시다.
(1)『中宗實錄』 32년 12월 19일의 두 번째 사료 (인용 사료)
【原文】(前略) 且臣前爲軍籍敬差官, 往來咸鏡道, 鏡城以北, 則民戶三千三十二戶, 而富寧以北, 則民戶數少, 軍丁闕額甚多, 而近來則尤甚云。 且此道, 距京絶遠, 而六鎭皆用白磁器, 其弊大矣。 勿用京白器事, 監司處下諭可也。 此雖小事, 弊則大矣. (後略) 【역문】(전략)『中宗 32년 12월 19일의 두 번째 사료(전략) 신이 전에 군적 경차관(軍籍 敬差官)이 되어 함경도에 왕래하였는데, 경성(鏡城) 이북은 민호(民戶)가 3천 32호이며 부령(富寧) 이북은 민호의 수가 적은데다가 군정(軍丁)으로서 액수(額數)에 빠뜨려진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또 이 도(道)는 서울과의 거리가 매우 먼데도 육진(六鎭)에서는 모두 백자기(白磁器)를 사용하기 때문에 저들이 반드시 어물(魚物)로써 바꾸어 가는데, 그 폐단이 큽니다. 서울의 백자기[誤譯-경백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라고 감사(監司)가 있는 곳에 유시(諭示)를 내리는 것이 옳겠습니다. 이것이 비록 작은 일이기는 하나 폐단은 큰 것이기 때문에 아룁니다.
(2) 사료[原文]의 내용
보신바와 같이 이 사료는 영의정 尹殷輔가 감사에게 諭書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의 글입니다. 그것도 최근에 보고 온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한 것이 아니고 과거 尹殷輔가 경차관으로 있었을 때 함경도를 오르내리면서 보았던 일을 회상하여 지금은 어떨까 하는 노파심에서 감사가 있는 곳에 諭書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입니다.
영의정 尹殷輔가 軍籍 敬差官으로 재직하던 때가 中宗 4년(1509)이였습니다. 그러니 당시로부터 28년 전의 일이였습니다. 세월이 28년이면 강산이 세 번 바뀐 시간입니다, 과일의 씨가 아름드리나무로 자랐을 시간이고, 사람의 시신이라면 살은 다 썩고 뼈도 녹아 없어질 세월입니다. 왜 이런 사료를 인용했을까가 첫째 의문입니다. 그러나 『王朝實錄』에 있는 글이니 인용하였다고 봅시다.
(3) 사료[原文]의 날조
鄭良謨가 이 사료를 인용하여 주장한 내용은
“鄙邊한 咸鏡道 六鎭에까지 「皆用白磁器」라고 되어있다. 魚物과 交易하였을 것이니 弊害가 많고 결국은 京白器를 금하였으며. 地方庶民들까지 白磁의 使用이 퍼졌음을 말하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鄭良謨 著『世界陶磁全集』19「李朝」(東京: 小學館.1980),164쪽.
인용한 사료의 정확한 원문은 「而六鎭皆用白磁器」이다. 이 원문 중에 ≪地方庶民≫이라는 용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원문에 없는 ≪地方庶民≫을 날조 삽입하여 「地方庶民들까지 白磁의 使用이 퍼졌음을 말하고 있다.」라고 사료를 날조하였습니다.
이 원문에 ≪地方庶民≫을 날조 삽입하지 않았으면 地方庶民들까지 백자 사용이 퍼졌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4) 은폐(隱蔽)한 사료
中宗 32년 12월 19일은 기사가 많아서 5항으로 정리하여 수록되어있습니다. 앞에 인용한 사료를 날조하고 뒤의 4항의 사료는 은폐하였습니다. 은폐한 4번째의 사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은폐한 사료의 원문과 역문을 보면
【原文】 (前略) 前者各官守令等, 剝民膏血, 及恪謹其任者, 陞黜事, 與恤刑之意, 下書于各道。 磁器弊端之意, 亦言之。” 【역문】 (전략) 지난번에 각 고을의 수령들로서 주민들의 재물을 빼앗은 자와 그 임무를 삼가하여 잘 수행한 자를 승진시키거나 물리치는 일과, 형벌(刑罰)을 집행하는 데 신중히 하라는 뜻을 각도(各道)에 하서(下書)하였다. 자기(磁器)가 폐단이 된다는 뜻도 말하도록 하라.”
이와 같이 4번 째 기사는 中宗이 영의정 尹殷輔의 건의를 받아드려 감사에게 유시(諭示)한 내용입니다. 앞의 사료를 조작하였으니 이 사료를 은폐하지 않았을 수가 없었지요.
유시 내용이 상벌을 엄격히 하라는 내용일 뿐 백자기를 써서 벌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루에 일어난 일인데도 자기의 주장이 강조되는 조항만 인용하고 불리한 조항을 은폐하여 독자를 속였습니다.
또 이 유시에 첨언한 “자기(磁器)가 폐단이 된다는 뜻도 말하도록 하라.”라고 첨언한 이 磁器를 저자[鄭良謨]는 백자라고 우길지 모릅니다. 저자[鄭良謨]는 조선 초기부터 자기는 백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鄭良謨,著『韓國의 陶磁器』(서울, 韓國美術 叢書 文藝出版社, 1991), 410쪽)
그러나 우리나라에 磁器라는 명칭은 중국 사신 해수(海壽)가 世宗 5년 8월 28일 (1423)에 가지고 들어온 용어이고 그 전에는 沙器였습니다. 그러니 『世宗實錄』「地理志」는 9년 뒤인 1432년에 편찬되었으니『世宗實錄』「地理志」를 비롯한 일체의 공사(公私)문서에 세종 5년 (1423)이후 成宗代 까지는 沙器라는 용어는 어디에도 없고 오지 磁器라는 용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世宗實錄』「地理志」의 磁器所에서 생산되는 산품은 분청사기 인데 백자라고 우기는 사람이 鄭良謨입니다. 조선 초기 도자기의 명칭에 관하여 도자사 학자들의 주장이 중구난방이기에 이를 『朝鮮王朝實錄』에 의거하여 정리하여 밝힌 바가 있습니다, 그 책이 (졸 저,『백자청화연구 Ⅱ』,「조선자기의 명칭 검토」,(부산: 도서출판 세화. 2010), 89쪽.
(5) 이 연구가 미친 영향
학자가 연구한 논문을 외국에서 외국어로 발표하는 일은 환영할 일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논문이 국제적으로 인정되고 학문적으로 인류 발전에 기여가 될 때의 일이지 논문에 이용된 사료를 날조하고 은폐하여 자기 민족을 폄훼(貶毁)하고 자기 나라의 임금을 비하한 논문을 환영할 민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문 발표로 우리나라 도자 사학계에서 왕명무시는 공공연하게 발표되고 있습니다. 군주 국가에서 왕명으로 반포된 금령이 무시되었다면 일반 사서(史書)는 믿을 것이 없어집니다. 군주 국가에서 왕명이 무시되었다면 노비문서 한 장에 대대로 노비로 생활을 해야 하였던 조선 시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저자 鄭良謨가 필요할 때는 사서를 인용합니다. 예를 들면 『慵齎叢話』「陶磁編」의 世宗朝專用白磁를 인용하는 경우입니다. 필자[鄭良謨]는 서울 대학교 사학과 출신이라고 인터넷에 밝혀져 있습니다.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군주국가의 왕명 무시론을 그것도 남의 나라의 일이 아니고 자국의 금을 지방 서민의 위치에 까지 끌어내리다니, 그것도 사료를 날조까지 하면서,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6) 白磁器와 京白器
이 글에 인용된 中宗 32년 12월 19일의 2번째 기사의 원문에는 尹殷輔가 도자기에 관하여 두 가지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즉 앞의 용어는 白磁器이고 뒤에 쓴 용어는 京白器입니다. 이 글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의문이 있는 용어는 京白器일 것입니다.
京白器란 용어는 우리 도자사에는 처음 등장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鄭良謨]는 한마디 해명도 없이 京白器를 白磁器로 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이 글은 본인[鄭良謨]의 글이 아니라는 느낌이 듭니다.
白磁器와 京白器가 같은 뜻의 말이 라면 尹殷輔는 영의정의 직을 수행할 수 없을 만큼 노망이 든 사람으로 밖에 해석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다른 이유가 있다면 尹殷輔가 28년 전에 경차관으로 있을 때 함경도를 오가면서 보았던 일이니 확실치도 않은 일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고 말을 바꾼 것이 아닐까? 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본인[鄭良謨]이 이 글을 썼다면 京白器는 처음으로 등장한 용어이니 반듯이 해석이 되었어야 합니다. 京白器를 白磁器와 동일시한 것은 인용 사료 날조와 맥이 통하는 소행입니다. 저자[鄭良謨]는 白磁器와 京白器를 동일시하였으나. 질의자는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질의자의 견해를 밝히고 독자 여러분의 질책을 듣기로 합니다.
<질의자의 견해>
백자기는 세조 12년 4월 18일과 동년 6월 7일에 연거푸 공사처(公私處)에서 쓰지 말라는 금령이 반포되었으니 국토의 최전방을 지키는 兵營에서 국법으로 금한 백자를 썼을 리가 없고, 그간에 발굴된 유품들도 관사명(官司銘)이 각인된 그릇들은 모두가 분청사기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니 병영에서 쓰던 그릇이니 분청사기로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京白器라는 명칭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京城에서 가까운 分院에서 만든 粉靑沙器가 품질이 좋고 경성에서 六鎭까지는 먼 곳까지 가지고 왔으니 값이 비싼 고가(高價)품 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되어야하는 이유는 본 논문에서 은폐된 네 번째 사료에 감사에게 유시한 내용의 말미에 자기(磁器)가 말썽이 된다는 말을 첨언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육진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면 「무사(武事)에 힘써야 할 수령들이 기명(器皿)과 치미(侈靡-분수에 넘치는 사치)에만 경비를 낭비 한다」고 하였으니 서울서 가지고 온 고가품인 분청사기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또 유시(諭示)의 문맥으로 보면 분청사기를 쓰는 것이 위법은 아니지만 비용을 절약하는 의미에서 일반 병들과 같이 목기를 쓰도록 종용하고 있습니다, 저자[鄭良謨]의 주장처럼 백자기를 써서 처벌된 수령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7) 六鎭은 兵營
귀하[鄭良謨]는 “六鎭의 地方庶民들까지 白磁의 使用이 퍼졌음을 말하고 있다.”라는 주장으로 육진을 백성들이 거주하는 민가(民家)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鄭良謨 著『世界陶磁全集』19「李朝」(東京: 小學館.1980),164쪽)
六鎭은 조선 초기에 개척한 동북면[함경도]의 두만강 하류 남안의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을 일컫는 말인데 조선 세종 때 金宗瑞가 도절제사가 되어 7, 8년간 북쪽 변방에서 여진족을 무찌르고 비변책(備邊策)을 올리던 병영입니다. 尹殷輔가 감사에게 유시를 제안할 때 병마첨도절제사는 주진(主鎭)인 鍾城鎭에 주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六鎭을 알기 쉬게 설명하면 백령도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면서 도민(島民)을 보호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진족을 축출하고 六鎭을 설치하였으니 여진족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이를 방어할 군이 필요해서 군이 주둔한 곳이 六鎭입니다, 국토를 확장하자면 백성들이 거주해야 하는데 이 六鎭에는 사람 살기가 어려운 곳이어서 이주하는 백성이 없어서 하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사민(徙民)정책을 썼던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서민들이 백자기를 썼다는 말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입니다.
사민 정책은 우리 역사에 중요한 의제의 하나입니다. 사민정책은 세종 대에 시작하여 명종 때까지 이어지고, 과거(科擧)에도 논제로 출제하여 신인 발굴의 의제로 삼았던 중요한 정책이 요구되던 지역이었습니다. (『세종실록』 즉위년(1418년) 8월 22일(기해) 6번 째 기사: 『명종실록』 2년(1547) 4월 24일(을사) 3번 째 기사.)
(3) 민족의 고민
유네스코에서『朝鮮王朝實錄』을 세계의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은 민족의 영광이고 국민의 자랑이다. 그러나 이 소식으로 우리 민족을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도자사에 왕명무시론(王命無視論)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네스코에서『朝鮮王朝實錄』을 세계의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사유를 보면 오랜 역사를 한결 같이 기록하였다는 의미와 기술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임금도 사초(史草)를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사관(史官)들의 신분을 보장해 가며 비밀을 보장하였다는데 큰 의미를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세계의 200여 국가에서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받고자 출원한 나라가 한두 나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다 물리치고『朝鮮王朝實錄』이 선정되었다는 것은 임금님도 후세 사가들의 정당한 평가를 받고자 스스로를 자제하면서 국법을 지킨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침략자들이 조선의 도자사를 왜곡하려고 『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된 왕명 무시를 거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침략의 목적으로 자행한 일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저자[鄭良謨]의 王命無視論은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법을 백성이 지켰을 때 효력이 이는 것이지 임금이 애쓴다고 될 일인가. 백성들은 왕명을 무시하고 지방서민들까지 백자를 썼다는 저자[鄭良謨]의 왕명무시론이 있습니다. 이 글은 일본 동경에 있는 출판사 小學館에서 발행한 『世界陶磁全集』19권「李朝」에 일어로 발표된 글입니다. 이 글이 발표되고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무도 이 글을 분석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우리 도자사는 왕명무시가 정론인 것처럼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저자[鄭良謨]가 주장한 왕명 무시론(王命無視論)이 정당한 연구라면 우리는 유네스코에서 세계의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명예를 받지 않고 반납하는 것이 민족의 양심으로 지키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鄭良謨가 발표한 왕명무시론(王命無視論)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날조하고 조작한 글이니 우리는 이 그을 분석하여 정당히 평가하여 『朝鮮王朝實錄』의 진실을 바르게 평가하여 유네스코에서 주어진 명예를 떳떳이 받아 민족의 자랑으로 삼고 후대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어느 종교의 경전에 이런 말이 있습디다. 유식한 사람은 무식한 사람을 비평하지 않는다. 그가 무식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식한 사람은 유식한 사람은 비판합니다. 유식한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을 무식한 사람이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진리인 것 같습니다. 많은 도자사 전문가들이 비판하지 않은 것이 鄭良謨가 무식해서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비판하여 진실을 밝히지 않을 수 않을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왔습니다.
서양사에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지동설(地動說)을 다시는 거론치 않기로 약속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법정 문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 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후세의 사람들이 만든 말이겠지만 鄭良謨가 王命無視論을 날조 발표하고 오랜 세월 아무도 비판하는 사람이 없지만,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다시 주장하지 않았어도 지금은 지동설을 부인하는 사람이 없듯 군주국가에 王命 無視는 있을 수 없는 것이 진리일 것입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도자사를 빨리 벗어나 새로운 도자사를 써야 하기에 날조된 鄭良謨의 王命 無視論은 철저히 분석 비판 되어야 할 것입니다.